아직도 답답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이 없었거나 활동하지 않았거나, 내주하지 않았다는 답답한 견해를 추종합니다.
깊은 연구가 없으면서 막무가내로 우기는 형편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대해 말하면서 오순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의 영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즐겨 사용하던 아버지의 성령을 자주 사용합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오순절 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아들의 영이나, 오순절 이전 활동하던 아버지의 성령을
아무런 격식없이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보낸 성령의 역사하심이나 그 이전 구약백성들에게 내주했던 아버지의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무런 차이가 없었던 것 처럼 사용하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형식을 이해하면 우리가 구약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 백성들에게 내주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인도하셨던 풍성한 삶과 구원에 대해 올바른 견해가 세워집니다.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1:19)과 하나님의 성령(빌3:3)을 <현재 활동하는 동일한 성령>으로 보고 계십니다.
바울을 돕고 계신 그리스도의 성령과 빌립보 교우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은 동일합니다.
구약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셨던 성령을 이해했기에 이런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합니다.
특별히 고린도 전서 3장 16절에는 현재 이방인 성도들에게 내주하는 성령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릅니다.
*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야고보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
바울과 야고보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 구절이 구약 성경에서 인용한 것을 증거합니다.
구약은 아버지의 성령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 소유가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둘째는 구약의 하나님의 성령은 오순절 이후부터는 아들의 성령으로 활동하지만 모두 동일한 한 분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근한 호칭으로서 하나님(아버지)의 성령이나 또는 주의(예수님, 아들) 성령으로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연구하면 구약성도들 가운데 성령의 내주하심을
쉽게 발견하며,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따라오는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