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관점에서 본 성경개관(성경적 종말론의 전개)
(키이스 매티슨 저, 전광규 역)
FROM AGE TO AGE, (The Unfolding of Biblical Eschatology)
(Keith A. Mathison)
(친구 목사님이 정리한 것을 올립니다)
서론
교회사의 각 시대마다 교회는 서로 다른 교리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처음 몇 세기 동안은 삼위일체 및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정확하게 체계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역의 결실은 여러 교부의 글과 니케아 신조 및 칼케돈 신조에서 발견된다.
여러 세기 후에는 구원론과 교회론이 교회의 관심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런 교리들을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종말론은, 초기에도 무시되는 않았지만, 참으로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 교회의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유행한 세대주의의 등장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C. H. 다드, 위르겐 몰트만을 비롯한
20세기 여러 저자들의 영향력 있는 저서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은 성경과 신학, 역사 연구에 있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해 왔음이 분명하다.
1. 종말론의 정의
‘종말론’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말론’(eschatology)의 영어 단어에는 에스카토스(끝)와
로고스(말)라는 두 헬라어 단어의 합성어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은 개인(예를 들어, 죽음 및 중간 상태)
및 우주 역사(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재림, 일반 부활, 마지막 심판,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마지막 일들에
대한 교리’로 정의되어 왔다.
이런 정의 때문에 대부분의 종말론 연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 즉 개인의 삶의 마지막이나 역사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논의에 국한되어 왔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종말론은 역사에 대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계신 목적에 관한 성경의
교훈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종말론은 역사의 끝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지만, 또한 하나님의 목적이 전개되는 단계에 대한 연구도 포함한다.
종말론에 대한 이런 이해는 이 책의 내용에 여러 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초림이
‘말세’(the last days)를 시작되게 했다면 성경 종말론에 대한 연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재림은 물론
초림에 대한 연구도 포함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초림을 위해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하신 준비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다시 말해 종말론은 성경 전체에 대한 구속사적 연구를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종말론에 대한 이런 넓은 이해를 유념하며 집필했다.
2. 성경신학
이 책의 부제는 ‘성경적 종말론의 전개’(The Unfolding of Biblical Eschatology)다. 이 부제는 고찰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 내가 기본적으로 어떤 접근법을 취하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이 접근법에 대한
착상은 게할더스 보스와 헤르만 리델보스 같은 개혁주의 성경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윌리엄 덤브렐
같은 이들의 저작에서 얻은 것이다.
그들의 인도를 받아 나는 성경 신학의 관점에서 종말론 주제를 다루었다.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종말론을
다룬 뛰어난 저작이 많이 있지만, 이 책은 그런 책들과 다르다. 그러나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 다 꼭 있어야 한다.
성경신학은 단지 같은 성경 교훈에 대한 색다르고 보완적인 접근법일 뿐이다.
그러면 ‘성경신학’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요한 가블러라는 신학자가 1787년에 행한 교수
취임 강의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구분한 데서 성경신학의 기원을 찾는다. 그러나 가블러는 성경에
대한 이성주의적 접근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성경신학’에 대한 가블러의 이해는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해와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성경신학’을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소위 성경 신학운도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신학
운동은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데다 고등 비평의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결국 이 운동은
랭던 길키와 제임스 바의 비평 아래 무너지고 말았다.
‘성경신학’의 이런 부적당한 변형들을 제쳐 둔다면, 어떻게 성경신학을 이해해야 하는가?
개혁주의 신학자인 게할더스 보스가 도움 되는 기초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보스는 “성경신학이란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자기계시 과정을 다루는 주경 신학의 한 분야”라고
적고 있다. 폴 윌리엄슨은 도움이 되는 되 확대된 정의를 제시한다.
“성경신학은 성경 전체를 통해 전개되는 신학의 궤적을 추적하되 어떤 성경 개념이나 주제나 책을
전체에서 분리하여 탐구하지 않는 총체적인 기도(企圖)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마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오히려 각각의 개념이나 주제나 책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거대 이야기에 어떻게 기여하며 그것을 어떻게
진척시키는가 하는 관점에서 고찰되며,보통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전진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에
이르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이런 시각에서 성경신학을 바라볼 때, 성경신학의 진정한 전신(前身)은 초기 개혁주의 언약 신학자들,
특히 요하네스 코케이우스(1603~1669년) 같은 사람들의 노력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신학의 많은 시도가 실패한 이유는 성경을 기록한 인간 저자들에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즉 특정한 책이나 저자를 더 넓은 성경의 문맥과 분리하여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저자들이 기록한 66권을 한데 모은 것이지만,
또한 하나님이 영감하신 한 권의 책이기도 하다.
찰스 스코비는 성경신학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있어 이런 사실이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은 각각의 책과 저자를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만 아니라 정경인 성경 전체 문맥에서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각각의 책을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정경인 성경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66권의 합보다
더 크다.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신약은 구약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성경신학은 ‘성경 전체의 성경신학’
(whole-Bible biblical theology)이 될 것이다. 성경 전체에 단 한 분의 궁극적인 저자가 계신다는 사실은
또한 성경 66권 가운데서 근본적인 통일성을 찾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성경신학자가 구약을 통합하는 원리를 찾는 일을 단념했으며, 하물며 전체 성경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예를 들어, 게르하르트 하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중심점이나 중요한 개념, 초점에 근거하여 구약 신학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필연적으로 구약 전체의 신학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왔다. 왜냐하면 성경의 전체 자료를
완전하게 설명해 주는 그런 통일성 있는 원리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은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한 분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어이없게도 성경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유형의 책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참작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만일 성경 각 권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 중 어떤 책들이 진행되는 구속사의 이야기
(narrative)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과 역사서는 창조에서 이스라엘의
포로 회복에 이르는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신약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그와 똑같은 역할을 한다. 구속사를 개술하는 이 책들은 성경 이야기의
중추나 뼈대를 이루며, 다른 책들은 이 뼈대를 배경(문맥)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구약 선지자 대부분은 열왕기하가 서술하는 역사 기간에 그들의 책을 기록했다.
또 사도 바울은 그가 쓴 서신의 대부분을 사도행전이 서술하는 역사 기간에 기록했다.
성경에서 역사 이야기가 아닌 책은 모두 그 이야기가 서술하는 기간에 기록되었다.
또 그 가운데 많은 책은 역사 이야기가 서술하는 사건들을 해석하고 있다.
이 역사 이야기, 즉 성경의 이 뼈대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어 가는 역사 가운데 통합적인 원리를 발견한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 및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포함하며, 그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정점에 이른다.
3. 해석학상의 고려
더 나아가기에 앞서, 근본적인 해석학상의 쟁점 몇 가지를 간단히 다루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해석학’(hermeneutics) 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해석 작업을 지도해야 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교회 역사 내내 해석학을 중요한 문제로 여겼지만, 오늘날 많은 서구 교회 및 문화에서 해석학을
대표적인 쟁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의 해석학 논쟁은 흔히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있어서 이 거대한 논쟁을 세밀하게 다루려면
별도로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학의 쟁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요소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일은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1) 개혁주의 전통과 성경
무엇보다 나는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기독교 신자로서 성경 해석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핑계대지
않고 인정한다.
‘개혁주의’라는 말은 보통 16세기 종교개혁 분파 가운데 칼빈 계열을 루터파 및 재침례파와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개혁주의 개신교의 교리는 프랑스 신앙고백(1559)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벨기에
신앙고백(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2 스위스 신앙고백91564),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1647)같은 신앙고백서에 가장 분명하게 표명되어 있다.
역사상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는 존 칼빈, 프랜시스 투레틴,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하지, 벤저민 워필드,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가 있다.
이 책의 독자는 내가 이런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독자는 개혁주의든 아니면 루터파나 세대주의나 다른 어떤 것이 됐든 자신의 근본적인
신학(또는 반신학) 전통에 속해 있다. 이런 전통은 우리의 근본적인 세계관 및 전제를 형성하며
깊이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그런 세계관 및 전제는 우리가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우리가 속한 전통은 흔히 우리가 묻는 질문 자체를 좌우한다.
내가 자신을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단지 독자에게 알리려는 것만 아니라 이
주제를 고찰해 나가는 동안 내가 어떤 신학전통에 속해 있는가를 나 자신이 의식적으로 상기하기
위해서다.
2) 철학과 성경
기독교 해석학 및 신학에 대한 역사를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철학적인 전제들이 성경 해석 및 신학적인
사고에 미친 영향을 이내 알 수 있다. 몇몇 초대 교부들의 신플라톤주의에서 중세 말기의 많은
스콜라 철학자의 유명론에 이르기까지, 또한 루돌프 불트만의 신칸트 철학 및 실존주의에서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전제들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기는 성경에 아무런 철학적 전제없이 접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가지가 가진 전제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오히려 그 전제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기가 더 쉽다.
20세기 서양에서 태어난 우리는 수많은 철학 사상의 가닥이 빚어낸 세계관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 속에서 자라왔다.
우리가 데카르트와 흄,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와 니체, 그리고 로티와 데리다 이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바꿀 수 없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뿐만 아니라 실용주의와 자연주의, 실존주의,
상대주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성 세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또한 우리는 모더니즘의
확신에 찬 교만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회의적인 교만에게 점차 밀려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다양한 철학은 하나님과 인간, 언어, 계시, 역사, 과학, 윤리, 정치 등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우리가 호흡하는 지적인 대기에는 이런 다양한 사상이 들어 있지 않다고 자처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그 사상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자각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사고에 이런 사상들이 미치는 영향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계몽 운동 때에 일어난 몇몇 철학 사상은 결국 특별 계시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열렬한 반초자연주의를
낳았다. 성경은 인간의 책에 불과하며,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은 자율적인 인간 이성이라는 궁극적인
기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때로 명제적(propositional)관점이라고
불렸던 전통적인 기독교 계시관은 거부당했다.
모더니즘의 관점과는 대조되게 나는 전통적인 계시관을 옹호할 수 있다고 단언하며, 또한 하나님이
실제로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계시하셨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나는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감되고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대한다.
성경 계시의 특징 때문에 언어에 대해 반드시 한 마디 해야 한다. 이 주제와 관련 있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는 문헌이 방대한 데다 이 짧은 지면에서 관련된 모든 쟁점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 쟁점 모두를 논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단락의 목적과 관련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에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 이해에 가장 심각한 도전이 되었던 두 가지는 논리 실증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제기한 것이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모든 종교 언어는 인식적으로
무의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왜냐하면 종교 언어는 경험상 입증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인간 언어의 충족성에 대해 또 다른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계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비명제적이고 개인적인 만남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언어 이해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오늘날 논쟁의 중심에 있지 않다.
논리 실증주의 및 그 기초가 되는 증명 원리는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체적으로 거듭 드러내 왔다.
계시에 대한 신정통주의의 교리 및 인간 언어의 불충족성에 대한 신정통주의의 주장도, 비록 여전히
여러 집단에서 인기를 끌고 있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왔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들어, 자크 데리다 같은 해체주의자들과 리처드 로티 같은 신실용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언어 이해에 가장 심각한 철학적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데리다와 로티는 둘 다 우리의 언어가
언어 외적인 어떤 실재를 가리키는지 여부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데리다는 그가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라고 부르는 신념, 즉 “우리의 경험의 질서를 잡아주는 전체적인
구별 체계는 물론 우리의 말이 세계와 부합한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어떤
안정된 지점이 언어의 외부-이성, 계시, 플라톤의 이데아-에 존재한다는 신념”을 거부한다.
리처드 로티의 신실용주의 철학을 문학 비평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스탠리 피쉬였다.
피쉬는 의미가 텍스트 안에서나 저자의 의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기보다 독자는 읽는 행위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런 저자들이 밝힌 견해는 이 짧은 지면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복잡 미묘하다.
따라서 데리다와 로티, 그리고 그 제자들의 철학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만 말해 두도록 하자.
반대 주장에 대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견해는 필연적으로 쓰기와 읽기 모두를 무의미하게
하는 언어의 허무주의를 낳는다.
데리다와 로티의 견해는 계시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3) 역사와 성경
역사와 성경 해석에 관련된 쟁점은 방대하고도 중요하다. 이 쟁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17~18세기까지는 교회 안의 대부분의 사람이 정말로
성경에 기술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인 관점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제일 먼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저작을 통한
철학적 합리주의의 발생, 특별히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통한 회의적 경험주의의 발생에서 감지된다.
이런 철학 운동에 대응하여 합리주의적인 종교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한 사람들로는 영국의 이신론
자들이 있다.
이신론자들은 “초자연적인 것은 역사의 요인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근본적인 가정은 많은 유력한 학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고트홀드 레싱이 저자 사후에
출판한 헤르만 라이마루스의 저서는 성경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심각한 의혹을 표명했다.
또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 저술들은 실제 있었던 역사를 밝혀낼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칸트의 저술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회의주의가 자라나는 데 기여했다. 성경 연구에 미친 칸트 사상의
영향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 감지되고 있다. 그 영향력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감지된다.
1835년에는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스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가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성경 학계의
국면을 변화시킨 대단히 논란이 되는 책으로 판명되었다. 스트라우스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성경의
기사는 ‘신화적’ 언어의 사례라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의 저서는 독일과 영국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어지는 세대의 수많은 학자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루돌프 불트만은 20세기의 비신화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트라우스 시대 이후로
성경 기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의 역사적 특성을 부인하는 것이 비평적인 성경 학계의
일상사가 되어 오고 있다.
이런 경향 가운데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실례는 ‘예수 세미나’의 연구에서 발견된다.
이 회의적인 비평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주장은 잘못된 철학적 가정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들은 또한
실제의 증거를 다루지 않고 있다. 많은 학자가 이 비평학자들의 미심쩍은 철학적 가정들을 검토해왔다.
또한 많은 저작이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확증하는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증거들을 다루어왔다.
회의적인 성경 비평주의의 ‘확신 있는 결론’은 도저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거듭 입증되어
왔다.
4) 성경의 석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영감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사실이 신비하고 비밀스런
하늘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듯은 아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역사성 없는 문서가 아니다. 성경의 인간 저자들은 실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실제의 인간언어(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기록한 실제의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일반적으로는 인간 언어의 특징에 대한 이해,
특별하게는 성경 언어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성경의 여러 책이 기록되고 수신된 보다 넓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본문과 배경 모두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창조물로서 창조주 및 다른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도록
언어의 재능을 부여 받았다.
존 서얼은 언어-어떤 언어든지-를 말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규칙이 지배하는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바르게 이야기한다.
그 규칙을 습득하고 언어가 바르게 작동하게 되면 인간은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말과 글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제일 먼저 밟아야 할 단계 가운데 하나는 그 본문의 장르를 판정하는
것이다. 언어는 어떤 규칙들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규칙들 가운데 많은 것은 장르에 좌우되므로,
주어진 본문 안에서 어떤 종류의 의사소통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의사소통 행위의 장르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1938년에 일어난 [우주전쟁]의
공포를 언급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올슨 웰즈가 H.G.웰즈의 소설을 극본으로 각색해서 라디오를 통해 읽기 시작하자 많은 청취자가
한 장르(드라마)를 다른 장르(실제의 뉴스 보도)로 오해하여 화성인들이 지구를 침입했다고 믿었다.
그날 밤 공포에 휩싸였던 사람들은 개개의 말과 문장의 의미는 이해했다. 문법과 구문은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이해로는 부족했다. 정확한 장르를 분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듣고 있는
내용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이다.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도 똑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시를 역사 서술로 해석하거나 역사 서술을 비유로 해석할 경우 필연적으로 오해를 낳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장르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본문 자체는 물론 배경이 되는(contextual)요소들을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
케빈 반후저는 배경(문맥, context)을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한 본문과 함께 고려해야만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라고 도움이 되도록 정의한다. 예를 들어, 배경은 특정한 성경 저자가 하고 있는
말이 문자적인지 상징적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일 배경이 저자가 시를 쓰고 있다고 말해 줄 경우에는 상징적인 언어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석의 작업에서는 정경상의 배경 및 역사적 배경 또한 중요하다.
만일 성경 전체를 하나님이 전달하신 하나의 완전하고 통일성 있는 본문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성경의
여러 책을 단지 자체적으로 완전하고 독립된 본문으로 보아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의 각 책은 성경 전체라는 배경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개개의 본문은 역사적 배경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구약 예언이 기록된 때가 바벨론 포로 이전인지, 포로 기간인지, 아니면 이후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큰 본문을 구성하는 벽돌들은 단어와 문장이다.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작은 벽돌과 큰 배경을
둘 다 이해해야 한다.
사실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이해하려면 다른 하나를 이해해야 한다. 앤터니 씨슬튼은 이렇게
설명한다.
“언어나 문헌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에 대한 이해에 좌우되며, 반대로 이 작은
단위들에 대한 이해는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좌우된다.” 따라서 해석자는 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한다.
실제의 언어 사용에 있어 개별 단어의 목적과 역할은 부정적인 석의의 결과 때문에 종종
오해되어 왔다. 예를 들어, 언어 의미의 기본 단위는 더 넓은 배경(context)에 속한 본문(text)
전체라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의미의 기본 단위는 독립된 개별 단어가 아니다.
개별 단어는 대부분 여러 가지 의미, 즉 가능한 의미의 범위를 갖고 있다.
그런 가능한 의미 가운데 어느 것이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인가는 특정한 문장 안에서 단어의
용법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각각의 문장의 의미 또한 문장의 배경(문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올바른 석의를 위해서는 큰 그림(예를 들어, 장르, 역사적 배경)은 물론 세부 사항
(예를 들어, 어휘와 문법, 구문상의 문제)도 세밀히 검토할 것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꼭 다루어야 할 두 가지 문제는 올바른 해석을 위한 믿음의 필요성 및 성령의 조명에
대한 것이다.
모이세스 실바 같은 저자에 따르면 “저자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해
가장 중요한 선결 조건이다.”
이 말은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고린도후서 3장 14~16절과
4장 4절같은 성경 구절의 지지를 받는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가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믿음은 성경 전체를
온전하고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필수 선결조건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불신자는 성경에서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는 물론 불신자도 주어진 성경 본문이 담고 있는 명제적인 근본 내용은 이해할 수 있다.
양자는 모두 히브리어 및 헬라어 어휘와 문법, 구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언어학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신자와 불신자 모두 역사적 배경을 연구하고 본문의 장르를 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 행위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용어를 사용해 말하자면, 본문은 불신자의 경우와
달리 신자에게는 ‘발화수반 효과’(illocutionary effect:화자의 말이 행동으로 수행되는 효과-역주)를
낳는다.
도움이 될 만한 예화를 들어보자. 당신이 낡은 집에 들어가 다락방에서 먼지투성이의 편지 상자를
발견한다고 가정하자. 상자 안에서 당신은 1858년에 존스 씨가 자기 아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를 읽은 당신은 존스 부인이 1858년에 편지의 명제적 내용을 이해한 것과 똑같이
그 명제적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편지가 당신에게 미치는 효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당신에게 직접 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신자가 성경을 해석할 때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난다.
불신자가 성경의 명제적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신자는 하나님이 성경 본문의 저자라고 믿지 않으며, 틀림없이 본문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성령의 조명 또한 성경에 대한 온전하고 올바른 해석을 위해 꼭 필요하다.
성령은 교회를 가르치고(요14:26)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도록 보냄을 받으셨다(요16:13).
성령이 주어진 것은 신자가 알고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다(고전2:12).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은
또한 성경의 온전한 의미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이 세심한 석의적 연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가 배우지 못한 문법과 구문, 배경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심으로 지적인 게으름을 보상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은 필수적인 동시에 신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충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5) 구성 및 접근법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이 책의 내용은 대체로 정경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첫째로 구약 예언서를 다루는 장들에서 각 책은 연대순으로 다루어진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유다와 이스라엘이 둘 다 바벨론 포로를 향해 하향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구속사의 광범위한 이야기의 배경 안에서 여러 선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둘째로 바울 서신을 다루는 장들에서 각 서신 또한 연대순으로 다루어진다.
이것 또한 우리로 하여금 서신들을 사도행전의 이야기의 배경에 비추어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게 해준다.
이 책 전체에서 사용한 접근법은 ‘이야기식 방법’(narrative method)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책에 담긴 사상의 신학적 발전”을 추적하는 방법이다.
그랜트 오스본은 이런 접근법의 장점과 약점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한다.
“이 [방법]은 연구자로 하여금 책의 전개를 통해 주제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서로 뒤얽히는지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종종 책의 내용에 대한 미화된 개관으로 퇴보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점은 약점이다.
그러나 종말론 같은 주제를 검토할 경우, 성경 각 권이 이 종말론 주제를 어디서 어떻게 발전시키고
있는지 강조하면서 성경 각 권의 내용을 개관하는 것은 유익한 일일 수 있다.
또한 성경의 통일된 메시지를 강조하는 개관은 성경이 공통점이 없는 문서들의 집적에 불과하다는
만연한 억측을 반박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이야기식 방법을 약간 바꾸어서 발생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상당히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성경의 내용을 큰 숲을 관통하는 길에 비유한다면, 이 책의 각 장은 그 길의 특정 구간에 서 있는
나무들에 대한 다소 세밀한 관찰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각 장의 처음부터 끝가지 줌 렌즈를 사용하여 성경 각 권을 통해 발전하는
구체적인 종말론 주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각 장의 끝에서는 광각 렌즈를 사용하여 성경
이야기라는 큰 그림의 관점에서 우리의 위치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바라볼 것이다.
만일 독자가 성경 각 부분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앞서 성경의 관련된 부분을 기도하며 읽는다면
이 접근법을 통해 최대의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종말론에 접근하는 것도 매우 유익한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서론은 왜 성경신학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가능성이 없다고 절망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한 줄기 뚜렷한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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