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지남

아따나시오스(Athanasios, 아타나시우스) 신학

오은환 2020. 12. 12. 15:10

본 논문은 서철원 교수님이 신학지남 1998년 여름호에 올린 것으로

매우 간결하면서도 힘있게 요약 전달합니다.

목차를 따라 정리했습니다.

 

 

1. 아따나시오스의 활동

어린 시절부터 말씀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주교 알렉산더에게

비서와 학생으로 바른 신앙과 신학을 배우게 됩니다.

그곳에서 장로로 있던 아리우스가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란 주장을 펼쳤을 때(주후 318년),

아타나시우는 주교를 도와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니케아 회의 이전(325년) 아타나시우스는 25세 즈음에 두 권을 책을 저술합니다.

이 책들은 훗날 아리우스에 대한 변증에 큰 도움을 줍니다.

 * 이방인에 대항하여

 * 로고스의 성육신에 대하여

 

저자 서철원 교수는 아타나시우스의 생애를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아따나시오스는 수없는 살해 음모와 무고와 체포의 위협을 당하여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337년부터 362년까지 ...25년 어간에 걸쳐 유배를 반복하였다...오히려 362년부터 373년 그가

죽기까지는 완전한 그의 승리의 기간이었다.

 

아따나시오스는 단 한 사람이 온 천하를 맞서서 싸워 니케아 정통 신앙을 지켰다.

그는 자기의 영달과 안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바른 신앙의 확립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투쟁하였다"(p.89)

 

2. 성경으로 신학함으로 그리스도의 신격을 증명함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당대의 대학자인 오리겐의 신학적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철학적 사고를 배제하고 오직 성경으로만 신학을 쌓기 위해서는

오리겐의 신학을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평가는 후토스 L.  곤잘레스의 '기독교 사상사'에도 잘 나타납니다)

 

서철원 교수는 이런 아타나시우를 칼빈신학의 선구자로 표현합니다.

철저하게 성경에서 출발한 신학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성경만으로 신학하므로 철학(? 아마도 '성경'으로의 오타로 보임)과 철학으로 형성된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버리므로 종교개혁 당시 성경으로 신학한 칼빈의 선구자가 되었다"(p.90)

 

곤잘레스는 아리우스의 신학을 철학과 신학으로 형성된 오리겐의 우파로 봅니다.

아리우스 신학은 철저하게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웠졌다고 평가합니다.

서철원 교수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합니다.

 

"아레우스(아리우스)가 하나님의 아들은 피조물이며 그가 존재하기 시작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또 아버지도 아버지가 되기 시작한 때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이것을 반박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의 소생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실체는 분할불가하므로 하나이어서 한 하나님이라고

제시하였다"(p.90)

 

3.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실체의 소생이다.

아리우스 신학은 성자는 아버지가 만든 피조물이므로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 봅니다.

성자를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보면서, 성자의 역할이 성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정도로 한정합니다.

 

이에 반하여 아다나시우스는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임을 부각시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형상이 아버지의 아들되는 이유는 <아버지의 신성이 아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의 신성이 전달된 것이 바로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은 파악할 수 없고,

말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출생하였고,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출생하였다.

...아들 혹은 소생이란 인간적인 의미가 전혀 아니고, 하나님에게 적합한 방식이어서 동일실체를 말한다.

동일실체란 말은 <신성>이 분할이나 분열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p.93)

 

아다나시우스의 성자 신학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 아버지의 신성이 그대로 전달되었기에 아들로 출생한 것이다.

-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아다나시우스가 성자의 출생을 인간의 방법과 비교하지 않음입니다.

아기가 부모로부터 출생한 것을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출생시키는 장면을 보면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하와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4. 아들의 영원 출생

성자가 언제 출생하였느냐에 대해 인간적인 추측을 배제합니다.

사람의 아들처럼 어느 특정한 시점에 출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실체이고 아버지의 실체의 소생이어서 아들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었으면 아들의 영원성은 당연한 귀결이다...아버지가 영원한 것처럼,

독생자는 영원하고 영원한 말씀이다...이처럼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영원 출생하였으면

아버지는 항상 아버지이고, 아들은 항상 아들이어서 아들이 없던 때가 있을 수 없다"(p.95)

 

5. 아들은 아버지의 의지에 의해 출생한 것이 아니라 본성적인 출생을 하였다.

처음 이 구절을 접하면 매우 생소하며 과연 이런 부분까지 다뤄야 하는가 의문이 듭니다만

성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점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에서 빠질 수 없는 문구입니다.

 

" 그러면 아레안(아리안)주의자들들이 주장하듯이 사람들이 아버지가 되듯이 하나님이 시간내에서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아버지가 원해서 아들을 갖는 것이 아니다. 아들의 출생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고 넘어선다"(p.95)

 

아리안주의자들은 아들은 신적의지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성자가 없던 시대가 있었고,
아들은 무에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피조물이라 주장합니다.

아다나시우스는 이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본성대로 필연적으로 낳았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처럼 영원한 존재이다"(p.97)

 

 

6.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실체 호모우시오스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동일실체(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이 아들에게 주어졌기에 동일실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한 동일한 물이 수로를 따라 강에로 전달되듯이 아버지의 <신성>이 아들에게로 전달되었다...

아들이 소생으로는 달라도 하나님으로는 하나이다. 즉 아들과 아버지는 한 신성의 동일성에서

하나이다"(p.97)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셋이 하나라는 표현도 자세히 보면 그런 숫자적 하나가 아니라,

신성이 동일하기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더 특이한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입니다.

이런 바탕으로 구약의 여호와가 실질적으로 성자라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아따나시오스는 구약의 신현에 나타난 여호와를 로고스 하나님으로 일치시킨다"(p.98)

 

7. 아버지와 아들은 한 하나님이다.

아타나시우스의 성자에 관한 확고한 신학은 결국 성령까지 연결됩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라는 뚜렷한 관점을 제시하게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실체에서 출생하여 동일실체를 가졌고, 그 실체는 동일하고 분할불가하면,

한 신격이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두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성경적 유일신 신앙이고,

아따나시오스의 확신이었다. 삼위와 한 하나님은 조화하기 어려웠는데 아따나시오스는

바른 신학을 제시하였다"(p.98)

 

8. 로고스 하나님이 창조주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습니다.

위격(person)의 구분이 모호한 것입니다.

아들(성자, 로고스)이 아버지의 신성을 가졌기에 아버지가 하는 모든 일이 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아버지의 일이 바로 아들의 일이 된다...왜냐하면 아버지의 본성이 바로 아들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의 신성이 바로 아들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모든 일을 아들을 통해서 하신다.

창조와 섭리와 구원의 사역을 다 아버지가 하시되 아들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아들 로고스가 창조주로 역사하셨다"(p.99-100)

 

때때로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성자와 성령 부분에서 혼란스러움이 보입니다.

성령이 하신 일을 아들이 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손 혹은 하나님의 손은 성령을 가리킵니다(눅11:20, 행13:11).

 

"말씀이 아버지의 품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손이므로 아버지가 자기의 손인 아들을 통해서

만물을 만드셨다"(p.100) 

 

9. 로고스 하나님이 성육신하다.

성육신은 초대교회 신학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아타나시우스 역시 그렇습니다.

아들되신 로고스만이 구원을 주실 적합자로 봅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되 삼위의 로고스가 성육신하였다...로고스가 성육신한 이유는 처음에 창조를 만드신 이가

바로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타락후 창조를 갱신하는 일은 창조를 처음 만든 동일한 로고스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만물을 그를 통하여, 만드신 이를 통하여 창조를 구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아따나시오스는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삼위중 로고스 하나님이 성육신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p.101-102)

 

이런 해석은 타당성이 있지만 완전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삼위 하나님이 창조주로 일하심을 보여줍니다.

창조는 삼위 하나님이 고려하여 일하셨는데, 창조는 성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셨고,

창조의 근거와 섭리 그리고 재창조의 근거는 성자의 대속을 따라 이루어지며,

실질적으로 피조물을 만든 것은 성령의 사역이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접근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인간의 최종상태를 <신화>로 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많은 신학자들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셔야 죄와 사망에서 확실하게 구원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바로 회복시키고

또 사람을 신화(神化, deificatio) 시킬 수 있다...또 피조물은 피조물을 신화(神化) 할 수 없다.

참 하나님이신 아들 곧 참 로고스만이 사람을 신화하고 아버지의 면전으로 인도할 수 있다.

로고스는 본성으로 참 하나님이심으로 그의 신격에 피조물을 결합하므로 사람을 신화할 수 있다"(p.101,103) 

 

인간이 부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태를 신화(神化, deification)된 상태로 볼 것인지,

아니면 칼빈처럼 천사와 동일한 상태로 볼 것인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10. 성령과 삼위일체

성자의 하나님되심은 결국 성령에게도 적용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많은 시간을 성자에 대한 변론에 쏟았습니다.

그러나 인생 말년에 성령에 관해서도 다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삶의 마지막 기간 즈음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인 마케도니오스가 성령을 천사로 주장하는

이단을 꾀므로, 성령에 대한 저술을 하여 성령이 천사같은 피조물이 아니라 삼위의 한 위격이며,

분할불가한 한 신성을 가져 동일 실체임을 강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3조 성령론에 대한

바른 결정이 이루어지는 기초를 마련하였다"(p.104)

 

아리우스를 비롯한 아리안주의자들은 로고스를 피조물로 보았기에 성령 또한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성령을 영들의 하나인 천사로 본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정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결합과 통일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우리 안에, 아들이 우리 안에,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삼위 일체가 있으면 삼위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삼위가 한(신성) 하나님이고 다른 위격들은 한(신성)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였으므로 영은 말씀 안에 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영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리하여 전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이고,

분할불가한 삼위일체이다"(p.106-107)

 

그의 특이한 관점은 성령과 성자의 관계입니다.

성령이 아들에게서 나온 것을 강조하다보니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성령이 곧 아들의 형상이란 점입니다.

 

"아따나시오스의 신학의 특이점은 아들이 아버지의 형상이듯이, 성령을 아들의 형상으로 본 점이다.

성령이 아들의 형상됨을 이렇게 설명한다. 즉 성령은 아들의 실체에 고유하고,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있어서 성령을 아들의 호흡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 믿는 자들이

세례 받을 때 주어진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피조물을 로고스에게 결합시킨다"

(p.106-107)

 

서철원 교수는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삼위의 사역의 방식을 확정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아따나시오스는 삼위가 연합으로 한 하나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 신성 곧 한 하나님이 삼위가 되고,

그러므로 삼위는 하나인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삼위는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한 신성이

삼위 안에 있다"(p.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