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에타 린네만은 독일 국립대학의 보기드문 여성신학자였다.
그의 스승은 비신화로 유명한 불트만이다.
비평학을 배워 <예수의 비유>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비록 비평학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녀는 늘 피폐한 삶을 경험했다.
"좌절감을 견더 내려고 무언가에 끊임없이 탐닉하게 되었다.
필자는 스스로를 마취상태에 빠져들게 하고자 텔레비전의 노예가 되었고,
술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p.10).
50 세가 넘은 나이에 하나님을 만났고 자신의 저술들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들을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필자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는 학생들에게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이었음을 깨닫고 회개를 했다"(p.11).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는 대학에 침투한 이방사상(철학, 문학, 과학)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인간 이성이 기준이 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손에 훼손되기 시작한다.
역사비평, 문학비평, 종교사비평은 그것을 사용하는 신학교수들을 망가뜨리고,
신학생들을 오염시키며 교회를 무너뜨린다.
저자를 통해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교들의 신학과 교수들의 상태를 보았으면 한다.
보수신학이란 곳도 실상 여러 비평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부분의 교수들의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기에 비평학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웨스트 민스터 신학대학원만 보아도 문학비평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권장하고 있다.
비평학에 빠지면 성경을 등한시 한다.
너무 많은 시간을 자신의 비평을 받쳐줄 이론들을 배우는데 소모한다.
막상 성경본문은 거의 손도 못대고 빈약함으로 흘러간다.
우리나라의 신학교와 교회 역시 퇴락의 역사를 걷는 이면에 이런 사상들이 존재한다.
신학교수들의 저술들을 보면 비평학의 틀로 독자들을 끌어 들인다.
독자들은 이런 책들을 철저하게 걸러내야 한다.
"문학비평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지 않는, 하나님 말씀과의 쓸모없는 유희에 불과하다.
... 이런 일을 하고자 많은 작업과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일주일에 60 시간은 보통이며,
이것도 정신적, 육체적 힘이 소진할 때까지 일생을 바쳐야 한다"(p.138)
무천년적 견해를 지닌 한국의 몇몇 유명 학자들을 보라,
그들은 <묵시문학과 요한신학>이란 거대한 장애물을 계시록 해석의 바운더리로 설정한다.
이것을 모르면 계시록에 접근불가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제시한 묵시문학과 요한신학은 일종의 <보청기 역할>을 한다.
청중은 보청기가 없으면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의적절한 예로 비평학을 정죄한다.
"신자가 신약의 메시지를 믿음을 갖고 듣고자 <역사비평이라는 보청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을 할 권리가 어디 있는가?
(비평학자들은) 그러므로 신약의 문서의 이해를 위해서는 모든 일반 고대 문서에 적용되는
역사비평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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