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칼빈신학

율법을 주신 목적(칼빈)

오은환 2018. 1. 27. 15:23

기독교 강요 제 2 권, 제 7 장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 7 장은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7장의 율법의 목적은 이전 6장의 제목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6 장은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한다는 제목처럼 율법은 이런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칼빈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 '셋째 효용'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지만, 루터는 정죄적 기능을 가장

중요시한다. 칼빈은 율법의 정죄 기능은 그 진정한 목적에 대하여 '부수적인 것'이라고 본다. 율법은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에 한해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이다"(기독교 강요 (상), p.501-502)

 

칼빈이 보는 율법의 관점이 매우 성경적이며 포괄적 접근입니다.

또한 율법을 성례로 보았던 것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참여함, 한 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제공합니다.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


1. 중보는 타락한 사람들만 돕는다. 

"율법을 주신 것은 선민을 그리스도에게서 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여,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 원칙을 가르치는 십계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하신

종교 형태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의 예배 형식은 진정한 것에 대응하는 그림자와 상징이다.

율법의 형식을 그 목적에서 분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허망한 것이라고 단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올리시려는 것이었다"(p.501-503)

 

2. 율법에는 약속이 포함되었다. 

"바울은 악한 교사들을 상대로 논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서 율법 자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율법은 거저 택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포함한

<아름다운 것>이었다"(p.505)

 

3. 율법은 우리를 변명할 수 없게 만들어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이것은 율법의 목적이 아닌 목적에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4. 그러나 율법의 약속은 무의미하지 않는다.

 

5. 우리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6. 율법은 엄격해서 우리의 모든 자기기만을 빼앗는다. 

 

7. 율법의 정죄기능은 그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8. 율법의 정죄 기능이 신자와 불신자에게 미치는 영향

 

9.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함으로서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견해에서 찾아보는 약함은 성도들에게 율법을 조명하는 존재인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부분입니다. 성령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 하며,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아쉽습니다. 

 

10. 율법은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율법의 역할속에서 일반은총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좀 아쉬운 것은 율법이 각 사람의 마음 속에 조명이 될 때 그 역할이 살아남을 설명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이란 단계가 생략된 채 사람과 율법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11. 율법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을 억제한다. 

칼빈은 성례를 통해서 구약 성도들의 거듭남을 인정합니다.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의 거듭남을 인정했는데 율법을 받은 자들 중에서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하니

이것 또한 모순처럼 보입니다.

 

칼빈이 이 부분을 다룰 때 구약을 뛰어 넘어 신약의 이방인들에게만 설명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율법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중생이 일어나기까지 깨우고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의 의를 가진 자들을 죄인임을 보게 만드는 일과 반대로 정욕을 따라 살아가려는 자들을 굴레로 씌워 중생할

때까지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12. 신자들도 율법이 필요하다. 

"이 용도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별견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의 성격을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사도는 중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율법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서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 가 하는 것을 가르친다. ...다윗은 율법에서 중보를 인식했다는 것을 알린다.

중보가 없으면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p.516-517)

 

13. 신자를 위해서 율법을 전폐하려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14.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어느 정도로 철폐되었는가?

 

15.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16. 의식적 율법

"의식들은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의식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허무한 외관을 제공했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은 준수하지 않게 되었으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폐지하시면서 자기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인하였다"(p.520-521)

 

17.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가 도말된다.

17번을 해석하는 방법은 기존의 주장과 모순되기도 합니다.

칼빈은 이 문장을 매우 어려운 것으로 여기며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습니다.

*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2:13-14)

 

위 구절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았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데 사용됩니다.

여기서 사용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다는 것이 율법의 어떤 부분인가에 대해 단순히 의식을 넘어,

어거스틴의 견해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어거스틴의 글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곧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죄에 대한 대속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히10:1, 레16:21). 유대인들이 제물을 드림으로서 얻은 것은 자기들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고백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와 같이 그들은 항상 자기의 죄와 불결에 대한 증서를 갱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를 준다고 해서 거기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때문에 사도의 글에 <구약하에서 없어지지 않던 범죄가>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 속량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히9:15). 그러므로 사도가 의식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증서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p.522-523)

 

위 구절을 해석함에서 칼빈의 견해가 많이 흔들린듯 보입니다. 

구약 성도들에게 없어지지 않았던 범죄가 존재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죄 사함이 없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위 구절은 단순하면서 성경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의문에 쓴 증서는 구약 성도들의 구원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에게 율법을 통해 즉 모형을 통해 주신 약속(증서)들이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더 이상 모형인 증서들을 통해 정죄 받지 않고,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실체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함께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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