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지남

세계복음주의 연맹(WEA)의 역사와 활동

오은환 2019. 9. 23. 19:36


이 논문은 총신대학원 신학지남 통권 339(2019년 여름호)에 실린 것으로 김요섭 교수의 글입니다.


    - 목 차 -


1. 들어가는 말

2. 복음주의 연맹의 역사와 활동

18468월부터 9월까지 13일간 개최된 런던 집회에서 복음주의 연맹이 결성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과 캐나다까지 각국 53개 기독교 기관의 대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몸이다"라는 주제로 모였다.

복음주의 연맹이 표방한 9가지 신앙고백이다.


① 성경의 신적 영감과 권위와 자족성

② 성경 해석에 대한 개인적 판단의 권리와 의무

③ 신성의 동일성과 그 안에서의 위격적 삼위일체

④ 타락의 결과로 인한 인간 본성의 전적인 부패

⑤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그의 사역과

    그의 중보적 중재와 통치

⑥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인들의 칭의

⑦ 죄인의 회심과 성화에서 성령의 사역

⑧ 영혼불멸, 육체의 부활, 의인의 영원한 복과 악인의 영원한 벌이 주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세상의 심판

⑨ 기독교 목회와 세례, 주의 만찬 규례의 의무 및 영속성의 신적인 제정


3. 세계복음주의 연맹의 태동

1846년 시작된 복음주의 연맹은 1912년 런던 대회에서 세계복음주의연맹(WEA)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 이후새로운 국제 정세에 맞춰 복음주의 교회들 간에 새로운 형태의

연합과 연대가 필요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강력한 현대주의의 도전으로 프린스턴과 미국장로교 총회는 변질되었고,

미국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19년 세계기독교 근본주의협의회를 경성하여 현대주의와 맞섰다.

1924년 어반확인서와 1925년 스코프재판 사건이 발생하여 미국교회의 자유주의가 창궐하였다.

메이첸과 100여명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미국정통장로교회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가운데서 또 분열되어 매킨타이어가 중심이 된 근본주의자들은 "필라델피아 근본주의협회"를

결성하고 페이스 신학교를 설립한 후 성경장로교회를 수립했다.

이들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29개국 39개 교단의 대표가 모여 국제기독교 협의회(ICCC)를 결성했다.

진보진영에서는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결성하고 첫 총회를 열어 교회일치운동을 시작했다.


1951년 8월 네델란드에서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되어 21개국에서 온 91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세워지기까지 숱한 과정들이 존재했고, 세운 후에도

세계 각지를 돌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후 2001년에 세계복음주의 연맹(WEA)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몇 가지 면에서 세계복음주의 연맹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것과 신학적으로 다소 느슨함으로 우려를 낳았다.


"2005년 캐나다 출신의 터니클리프 정책은 외적 조직을 강화하는데 너누 치중한 나머지

연맹 본연의 복음주의 신앙을 명확히 하는데 소홀했다는 피반적인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의 대표 임기 동안 세계교회협의회(WCC)나 로마 가톨릭 등과 연대하여

"다종교 세계에서 기독교 복음의 증거"라는 조직을 구성한 일은 세계복음주의연맹 안팎으로부터 

많은 비난과 우려의 소리를 듣는 원인이 되었다"(P.100) 


4. 세계복음주의 연맹의 사역과 평가

* 재정적인 어려움이 항상 따라다닌다.

*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


5. 맺음말

연합 사역의 어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복음주의 안에서 존재하는 다양성을 합하여 통일성을 갖춘 신앙을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인정하다보면 신앙의 훼손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이 있더라도 연합운동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