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유대인들은 그토록 할례를 중시여길까요?
초대교회 내에서도 할례 문제는 지속된 관심사였습니다.
최초의 교회회의 역시 <할례와 구원> 문제였습니다.
*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행15:1)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방인 성도들은 할례 자체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할례가 신앙생활의 시작이자(칭의) 성화에 대한 책임을 묻는
근거가 됨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행7:8)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행7:51)
스데반의 설교 역시 할례로 시작해서 할례로 끝납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하면 마음의 할례로 칭의(죄사함과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됨)를 받고,
성령이 내주하여 성화로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곧 성도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면서 칭의에 합당한 성화의 삶을 거부하는
것을 스데반이 책망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육체의 할례만 생각하기에 <마음의 할례>가 선행되었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할례에 앞서 마음의 할례가 먼저 일어났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일어났음을 증표하는 것이 육체의 할례입니다.
물세례를 받았다는 것이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전제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것은 할례의 본질을 모르는 것과 할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발생한 것 즉 그리스도를 보게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할례의 피흘림은 장차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흘림의 예표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근거로 할례를 통해 죄사함과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6:15)
할례는 칭의와 같습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할례로 인하여 칭의를 입었기에 또한 할례는 성화의 삶을 따라 가는 것의 근거가 됩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이런 점에서 성경의 본질 곧 신구약의 중심을 꿰뚫은 명설교가 된 것입니다.
칭의가 유효하려면 반드시 성화가 따라와야 합니다.
성화가 없는 칭의는 그 효력이 정지됩니다.
육체의 할례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선포는 스데반의 설교와 동일합니다.
* 네가 율법(성화)을 행하면 할례(칭의)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롬2:25)
할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의 바울 연구나 중간사 연구 혹은 구약이나 복음서 연구는
결코 본질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연구했던 것들이 초라하게 끝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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