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이란 서로 대조적일까요?
아니면 동일한 목표점을 지닌 것일까요?
이천 년 동안 혼란 속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혼란을 걷어내는 방법은 오히려 간단합니다.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 율법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정리하면,
* 거듭난 자 ↔ 거듭나지 못한 자
* 유대인 ↔ 이방인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
* 성도 ↔ 불신자
바울서신에서 율법과 복음이 뚜렷하게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구분을 보지
못함에서 기인합니다
바울이 율법을 복음과 대조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이방인 성도들이 과거의 삶을
비추어 볼 때 율법으로는 심판을 받을 대상이라 지목한 것 때문입니다.
불신 이방인들에게 율법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거듭났고 성도라 칭함을 받았던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은 무엇일까요?
*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10)
여기서 '생명'이란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생명이란 단어는 구약적 표현으로 <구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구약적 표현인 생명은 구원 혹은 영생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도 가끔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구원얻는 회개라는 의미로 생명이란 단어가 사용됩니다
*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행11:18)
율법의 역할은 이미 거듭난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불신자들에게는
죄의 삯은 사망이란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바울이 서신서에서 이제 막 복음을 접하고 구원에 동참한 이방인들을 향해 그들의 전과 후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율법을 통해 과거에는 죄의 저주 아래 신음하던 자들이 복음을 통해
참 평안을 누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율법 자체 곧 본질은 무엇일까요?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과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에 결코 나쁘거나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는 성령을 통해 율법을 지킬 힘을 주셨지만, 이방인 불신자들에게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음을 자각시킵니다.
*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다시 한 번 율법을 대하는 두 대상이 얼마나 차이를 느끼는지 알려줍니다.
거듭났던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신령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자신이 죄 아래
놓여 있음으로 한탄함으로 몰아갑니다.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7:14)
바울이 표현하는 '우리'와 '나'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로마교회 성도들을 묘사합니다(롬1:13)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알지 못했던 과거의 정체성을 현재 복음을 알고 난 후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없으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대혼란에 빠져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6. 난해구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 메지지 - 광대하신 계획과 성취 (1) | 2024.12.27 |
---|---|
할례의 본질과 효력 (0) | 2024.12.05 |
죽기 전에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온 것을 볼 자들 (1) | 2024.09.05 |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본 행위언약 (0) | 2024.06.18 |
스데반 집사의 설교 (1) | 2024.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