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마지막은 성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3 대 주제로 설정될 만큼 중요한 주제입니다.
기독교 강요 제 4 권의 14장부터 19장까지 성례에 대해 할애하고 있습니다.
제 14 장 성례
1. 정의
칼빈은 성례를 믿음을 돕는 수단이자 복음전파와 관련해서 봅니다.
우선 성례의 정의를 광의적 의미로 정의합니다.
"성례란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p. 336)
"더 간단히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p.336-337)
칼빈은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에 대해 좀 더 보완적인 설명으로 확실하게 마무리하고자 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이 자칫 교육이 부족한 사람들이 속기 쉽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어거스틴은 매우 간단하게 성례를 정의했습니다.
"신성의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
2. '성례'라는 말
희랍어의 비밀(뮈스테리온)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단어를 높이기 위해 신성한 일에 관련되어 비밀을
'sacrament 로 번역했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새크라맨트 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p.338)
3. 말씀과 표징
"성례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p.338)
칼빈은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영혼은 신체에 접붙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적인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를 하신다는 것이다."(p.338)
크리소스톰의 성례에 대한 표현은 매우 지혜롭습니다.
칼빈과 더불어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역시 성례애 대해 매우 올바른 관점을 지녔습니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칼빈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으로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외형적인 표징)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교황 독재 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 행위였다."(p.339)
(아마도 말씀이 빠져버린 것과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한 라틴어 사용에 대한 책망으로 보입니다).
칼빈은 성례를 행하는데 있어서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복음선포가 필요함을 토로합니다.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이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p.340)
5. 인장과 같은 성례
"교묘한 자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안다면 우리는 그 뒤에 오는 성례에서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알지 못한다면(성례의 힘은 전적으로 그 말씀에
있으므로) 성례전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p.340)
여기에 대해 칼빈은 정부 문서와 인장의 관계를 통해 설명합니다.
인장을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도 확인함으로 그런 걱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칼빈이 본 성례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담긴 것으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일수록 믿음을 지탱하기가 적당하는
것입니다. 성례야말로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고 말씀합니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주의 약속을 언약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약의 표라고 부르신다.
성례는 우리고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p.341-342)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혹자는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악인들도 성례가 제공되기 때문이라 공격
합니다. 칼빈은 이런 빈약한 공격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변명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좋은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성례의 효력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발생함으로 변호합니다.
8. 성례의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칼빈에 반대했던 자들은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만이 그 일을 하신다고 공격합니다.
칼빈은 여기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세 가지로 인정합니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셋째,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성례는 그 자체만으로 어떤 비밀한 힘이 내재되었기에 믿음을 강화하지 않는다.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 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가 없다. 성령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p.345-346)
칼빈이 본 성례의 유익은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세우신 방법을 따라 일하십니다.
매우 심도 깊은 연구로 우리 모두가 깊이 보아야 할 제목입니다.
특히 구약의 성례들 역시 동일한 원리가 적용됨을 이해했으면 합니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성령께서 우리 귀에 들리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당연히 순종해야 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에 전달한다."(p.347)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p.348)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창3:22),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셨다.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된다.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p.349)
13. '사크라멘툼'이라는 말
성례에 대해 어느 한 부분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나타납니다.
라틴어 '사크라멘툼'이 군인이 사령관에는 드리는 맹세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 설명이 안 된다고
칼빈은 생각하여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p.351)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성경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이런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아 넘어가는 것을 경계합니다.
"믿음과 관계 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다.
약속과는 관련이 없이는 성례에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성례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처럼,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의 보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구원의 보장을 받을 수 있다.
보이는 표징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보이는 표징이 있어도 진정한 성화가
없을 수 있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p.352)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진상(본체)과 외형(표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이 다른 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p.353)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아마도 칼빈은 구약의 성례들 역시 그 본체가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 같은데 매우 적절한 해석입니다)
...우리가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p.354)
17. 성례의 의무와 임무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p.355)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이 성례를 집행하는 중심이 되지 않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성례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신다.
또한 거기에는 보이는 성례의 모든 결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한 성화가 없이는 이 보이는 성례들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p.357)
18. 광의의 성례
칼빈은 성도의 미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시키기 위해서 하신 모든 것을 성례로 생각합니다.
넓은 의미의 성례로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주신 <모든 표징>을 포함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생명나무나 노아에게 주신 무지개 등을 성례로 봅니다.
생명나무 자체가 생명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입니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칼빈은 표징을 다른 말로 의식이라 사용합니다.
"성례를 의식(예식)이라고 부르며,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p.360)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구약에도 성례라는 단어를 사용할만한 의식들이 존재했을까요?
이 부분은 우리가 보는 신학적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대단한 발견으로 보입니다.
칼빈은 구약에서 다양한 성례들이 존재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사시는 그 경륜에 따라 성례는 각 시대에
맞도록 다양하였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모세의 율법에서 결례와 희생과 다른 의식들이
첨가 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구약 성도들)의 성례였다.
저 고대의(구약 성도들) 성례들은 현대의 성례전들과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인도하거나, 나타내고,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산상에서 제시된 율법대로의 회막과 예배의 하늘 모형도 여기(성례)에 속한다.
다만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동안에 <어렴풋이> 그를 예시했고,
현재의 성례는 이미 임재하셨던 그리스도를 확증한다는 것이다"(p.360-361)
칼빈이 제시한 성례의 폭은 다소 아쉽게 느껴집니다.
성례의 역할이 단순히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인도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몸)됨을 강조하는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신구약 모두 <복음에 참여함>이란 큰 목적과 풍성함을 누렸음을 누락시킬 수 있습니다.
용어에서도 고대나 유대인 대신 구약 성도들로 통일했다면 신구약의 통일성과 연관성을 부각시킬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잘라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아담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된다고 유대인들은 믿었다.
할례는 믿음의 의를 알리는 한 표징이었다(롬4:11). 바꿔 말하면 그 후손을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인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이 의인가요? 믿었기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적 관점입니다)
세례와 결례는 그들의 본성이 자신의 부정과 추악함과 오염으로 더렵혀졌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추악을 씻어 없애 버릴 다른 씻음을 약속했다.
이 씻음은 그리스도였다. 희생(결례)은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어떤 보속을 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p.361-362)
칼빈의 이런 관점은 매우 정확한 해석입니다.
앞의 20 장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구약을 성례로 보았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발견입니다.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성만찬은 구속을 얻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과 피와 성령(요일5:8)이 성례의 원천으로 보았기에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성례의 원천으로 불렀다."
(p.362-363)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칼빈은 '옛 율법과 새 율법의 성례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스콜라 학파의 교리를 전적으로 배척합니다.
"이들은 옛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할 뿐이고, 새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의 실재로서
준다는 듯이 구별한다. 참으로 사도는 조상들이 우리와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고 가르치며, 그 식물은
그리스도라고 설명했을 때에(고전10:3) 신약의 성례에 대한 것과 똑같이 구약의 성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통을 계시한 것을 누구 감히 헛된 표징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칼빈은 구약의 성례나 신약의 성례나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올바른 관점입니다.
"믿음의 이를 인치는 인이라고 부른 할례에 돌린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우리의 세례에 돌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현재 성례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받았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례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힘을 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느꼈다"(p.364)
칼빈은 히브리서를 오해해서 공격하는 자들을 방어합니다.
"율법의 의식들에 의해서는 죄는 속죄되지 않으며, 그 옛 그림자들은 의를 위해서 중요하지 않았다고(히10:1) 하는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거기서 논의되는 비교를 무시하고,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는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점만을 붙잡았다...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율법의 의식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효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p.364)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어떤 자들은 바울의 말을 인용해서 할례가 신약의 세례보다 낮게 보려합니다.
칼빈은 이런 관점들을 단호하게 배격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비교했을 때, 손으로 행한 할례를 완전히 멸시하는 것 같다고(골2:11-12)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귀절에서 할례의 위엄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미 폐지된 할례를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p.365)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동물 제사의 효력에 관한 의문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것은 (동물제사) 효력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표시하는 방법에 대한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반대론에 대한 더 명확한 대답을 원한다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있는 모든 화려한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지향하지 않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둘째 그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그가 육신으로 나타났을 때에 의식들은 성취되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의식들이 페지된 것은 그림자가 태양의 빛 가운데서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합당한 일이었다."(p.366-367)
26. 유사점과 차이점 : 어거스틴의 구별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성례에 대한 과도한 표현을 경계합니다.
특별히 신약의 성례들이 구약의 성례들보다 우월하다는 말들을 골라내고자 했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그런 실수를 범하지만 본질에서는 올바르다고 평가합니다.
"유대인들의 성례는 표징은 달랐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같았으며, 보이는 외형은 달랐으나 영적 능력은 같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표징에 동일한 믿음이 있다. 그들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물로 믿고 마셨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는지는 신자들이 안다.
...이 신비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은 외형에 있어서가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이다."(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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