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칼빈신학

칼빈의 세례 이해

오은환 2018. 1. 21. 15:38

기독교 강요 14장은 성례를 다루고, 이어지는 15장에서는 세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례는 성례의 한 축을 감당하기에 앞 글과 연관해서 보시면 좋습니다.

 

 

제 15 장 세례

 

1. 세례의 의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고 하겠다."(p.370-371)

 

2. 세례의 효력은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엡5: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씻는 진정한 물두멍이라고 확증하는 이 물에 대해서,

물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p.371-372)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세례는 과거의 죄를 위해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얻었다. 

그의 순결은 영원히 풍성하고, 어떤 오점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묻어 보리며 깨끗하게 씻어 버린다."(p.372-373)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처음 중생했을 때에 세례만으로 받은 사죄를 세례 후에는 회개와 열쇠의 덕택으로 받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열쇠의 권한도 세례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기의 죄과를 알고, 괴로울 때마다 단호하게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유일하고 영원한 씻음을 받았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p.374)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장사된 후에 할례를 받아 옛 사람을 씻어 버렸다(골2:11-12).

바울은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보른다(딛3:5).

이와 같이 먼저 죄의 용서와 의의 전가가 우리에게 약속되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개조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약속된다."(p.375)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이다.

"우리의 믿음이 세례에서 받는 이득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죽음과 생명에 접붙임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야 한다."(p.375-376)

 

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세례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이미 나타나신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눅3:16, 행19:4)."(p.377)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칼빈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세례나 오순절 날 임한 세례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질적으로 낮은 단계가 아닌 것은 세례주는 사람에 의해 세례의 질이 결정되지 않음을

견지합니다.

 

모든 세례를 주관하는 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도타투스파와의 논쟁을 했던 어거스틴의 말로 확증합니다.

"누가 세례를 주든간에 그리스도만이 주재하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삼는다"(p.378)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칼빈은 '육을 죽이는 일과 깨끗이 씻는 일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시>되었음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할례를 통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고 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인용합니다(고전10:2).

 

10.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칼빈은 오랫동안 세례에 대해 오해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원죄가 없어지게 되며,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고, 아담이 창조된 대로 바르게 살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그 의롭고 순결한 본성을 세례에

의해 회복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p.379)

 

칼빈이 보는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본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하였다고 말합니다. 

"유아들까지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고 다닌다. 그들은 자기가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죄의 씨>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이 저주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고 취소되었다는 확약을 받는다. 

세례의 표징에 의해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가 져야 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다 완전히 용서되었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는데, 오직 전가에 의해서만 의를 얻는다"(p.380)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은 신자라도 정욕은 결코 죽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신자가 세례를 받고 성령이 내주하더라도 죄와의 싸움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육의 가시에 찔려 고민하다가 기진하거나 실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목적은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 죽이는 일은 우리의 세례와 동시에 시작해서 우리가 매일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에게로 옮겨질 때에 완성될 것이다"(p.381)

 

12. 바울의 내적 투쟁 : 로마서 7장

위의 11번에서 신자의 죄와의 싸움을 하는 이유를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 중의 하나인 로마서 7장으로 접근합니다. 

칼빈은 로마서 7장의 <갈등>을 거듭난 바울이 겪는 내적 투쟁으로 묘사합니다. 

동시에 모든 신자들이 겪는 갈등으로 이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이 중생의 약속을 세례에서

받는다고(롬6:3) 첨부한다. 따라서 죄가 그 지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롬6:12).

바울은 신자에게 항상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바울은 중생한 사람 즉 자기를 예로 든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기의 육의 흔적과 싸우며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고 해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다고 한다(롬7:18-23).

바울은 세례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은 '비록 죄에 포위를 당하고 자기 속에 죄를 가지고 다닐지라도'

죄책과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가르친다"(p.382)

 

칼빈이 본 로마서 7장은 죄 앞에 한없이 나약한 신자로 묘사합니다.

아마 어거스틴의 해석에서 영향을 받은듯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싸워야 한다. 우리가 타고 난 저 육욕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없어질 수 없으며,

매일 축소시킬 수는 있어도 소멸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p.382)

 

13. 세례는 고백의 표

"또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이 된다.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한 세례에 의해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p.383)

 

14. 표징과 실상

세례를 통해 사탄의 지배력을 박탕하며, 신자의 정욕을 약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습니다.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고넬료는 이미 사죄와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역시 세례를 받았다(행10:48).

그는 세례에 의해서 사죄를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p.384)

 

16.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칼빈은 목사의 가치에 의해서 성례의 힘과 가치를 측정한 도나투스파에 반대하며, 

교황제도 하에서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올바른 세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재세례파의

견해 역시 거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며(마28:19), 

누가 집례하든지 세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유대인들은 불결하고 배교한

제사장에게서 할례를 받아도 무방했으며, 그런 표징이 무효하다고 해서 반복할 필요도 없었고, 도리어 그것은

그 진정한 원천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수단이 되었다.

 

고대에도 여러 가지 미신 때문에 할례가 부패했지만 여전히 은혜의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요시아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냈을 때(왕하22,23,18장),

그들에게 두번째 할례를 명령하지는 않았다"(p.386)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구약 백성들은 아무리 언약을 깨뜨렸을지라도 그 언약의 상징(할례)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견고하게 남아 있었고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은 다시 회복되었다"(p.387)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칼빈은 매우 난해한 부분을 거침 없이 뚫고 나갑니다. 

칼빈은 세례를 오직 한 번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의 반대자들은 에베소에 온 열두 제자들이 

바울로부터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공격합니다.

 

에베소의 열두 제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또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공격에 대해 달리 해석합니다. 

 

"나는 그들이 받은 것은 요한의 참 세례였으며, 그리스도의 세례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정한다. 

나는 더 단순하게 생각해서 성령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안수함으로서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p.388)

 

칼빈에게 있어서 세례의 질은 모두 동일하다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또한 세례를 두 번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논리는 구약시대나 오순절 이후에 처음 세례나 할례를 받았던 자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으나, 과도기적 시대(공생애)에는 예외적으로 두 번 혹은 세 번의 세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할례를 먼저 받았고, 요한의 세례를 받았고, 오순절 이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구약백성으로서 할례는 곧 세례와 동일한 의미를 지녔기에 당연히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세례는 메시아를 만나기 위한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함으로 인한 죄사함의 회개를

실행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다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멀리 떠났던 자들만 회개하고 받았습니다. 

 

세 번째 오순절 이후 세례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의 할례가 하나님의 지정한 방법(하나님의 이름 혹은 여호와의 이름)이라면, 구속사역을 완수한 이후에는

성령이 예수의 이름으로 오시기에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9. 그릇된 세례식과 세례식

칼빈이 생각하는 그릇된 세례는 당대의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세례식의 잘못된 모습을 실랄하게 드러냅니다. 

칼빈은 철저하게 세례에 수반되는 <물>만이 유일한 성례의 도구로 봅니다. 

여기에 반하여 카톨릭은 여러 가지 것들을 첨가했습니다. 

 

"주문, 촛불, 성유를 첨가했고 숨을 내쉬는 것이 세례의 문을 여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이런 이질적인 잡동사니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침과 그 밖의 값싼 허식을 노골적으로 함부러 끌어들여 세례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좋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p.389) 

 

"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뿌리기만 하느냐 하는

이런 세밀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가 다른 데 따라 교회가 자유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p.390)

 

20. 비상(非常)한 세례에 반대한다.

칼빈은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세례를 주는 일을 사역자들의 임무로 보기 때문입니다. 

비상적인 상황 즉 부득이한 경우에 어떻게 세례를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가부를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한 상황에서 세례를 주지 않는다해도 신앙만 있다면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에

세례를 주는 일을 안 해도 상관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여 있고, 당장에 성직자가 없을 때에는 평신도가 세례를 주는 것이 교회의 초기부터

오랫동안 관습이 되었다. 평신도가 부득이한 경우에 세례를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반복해야 된다고

경건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자들에 관해서는 카르타고 회의에서 여자는 일체 세례를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 병자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p.391)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영지주의자였던 말시온은 여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 역사를 통해 대답합니다. 

특별히 터툴리안의 여자들의 세례 집례를 반대함을 소개함으로 자신의 견해를 대신합니다.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칼빈은 십보라의 경우를 들어 여자들도 할례를 행할 수 있지 않느냐 주장하는 자들을 반박합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십보라가 경솔하게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로 매듭짓습니다. 

"독자들은 십보라에게는 하나님께 어떤 봉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하기를 바란다...유아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 표징(세례)이 생략될 때에, 그 원인이 나태나 멸시나 부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위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교회에서 받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에 결부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다"(p.394)

'21. 칼빈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과 유아세례  (0) 2018.01.24
칼빈의 분노 조절  (0) 2018.01.24
칼빈의 성례 이해  (0) 2018.01.20
기독교 강요 제 4 권 목차  (0) 2018.01.19
기독교 강요 제 3 권 목차  (0) 2018.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