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세례는 하나님의 깊은 지식과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엄청난 지식을 제공합니다.
성례의 깊은 곳을 다루기에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던 곳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4 권, 제 16 장에서 유아세례를 다룹니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칼빈은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전통을 계승할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핵심으로 보았습니다.
신구약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가교가 됩니다.
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현재 일부 열광적인 사람들이 유아세례 문제로 교회를 소란하게 하며 선동을 그치지 않으므로,
나는 그들의 광태를 억제하기 위해 부록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확실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폐지함으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불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p.395-396)
2. 세례의 의미를 공격한다.
"표징을 올바르게 고찰해야 한다. 세례의 가치와 목적 즉 그 본질을 완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물질과
물질적인 외형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세례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세례가 표현하는
내면적 신비를 생각해야 한다.
견고한 진상(眞相), 이를테면 그 본체를 파악할 때 외형적으로 물을 뿌리는 이유와 가치도 깨닫게 될 것이다.
(세례의 본질을 알게 되면 외형속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도 알게된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는 우선 우리의 죄가 깨끗히 씻긴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일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다. 다음에 세례는 우리의 육인 죽인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가함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다고 한다.
세례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한 가지 첨가시키면 세례는 또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상징이 된다"(p.396-397)
3. 세례와 할례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17장). 이 말씀에는 영생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해석하시고,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증명하셨다. 곧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
이시다고 하셨다.
바울도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주께서 어떤 멸망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출하셨는가를 가르칠 때에, 그들이
<할례의 언약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그리스도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었다고 추론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실 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이, 모세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육신이 받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신30:6). 또 아무도
자기 힘으로 진정한 할례를 얻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모세와 예언자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 가르친다(렘4:4, 겔16:30).
세례에서 받는 것과 같은 영적 약속을 조상들은 할례에서 받았다. 할례는 그들에게 죄사함을 받음과 육을
죽이는 것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두 가지를 겸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기초라고 한 우리의 가르
침과 같이, 그가 할례의 기초가 되신 것도 명백하다"(p.398-399)
4. 차이는 외적인 것에 있다.
"할례와 세례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두 표징의 힘은 약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
는데) 그 약속은 두 표징에서 똑같다. 즉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와 사죄와 영생이 약속되었다. 다음에
표현된 것 즉 중생도 같다.
두 표징의 기초 즉 이런 일들을 실현시키는 기초도 같다. 그러므로 성례의 힘과 성격을 평가하는 표준이
되는 내적 신비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차이는 다만 외형적인 의식에 있다.
외형적인 의식은 아주 경미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
한다면 할례에 속한 것이 모두 세례에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p.399)
칼빈이 보는 할례와 세례의 차이점과 유사점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이런 튼튼한 성경적 관점이 없다면 구약을 신약보다 낮은 은혜이자, 결함을 지닌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외형적인 표징은 성례의 말씀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다만 표징을 말씀과 따로 고려한다면 어느 편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 우리는 표징이 말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표징은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보다 낮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p.400)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할례의 언약은 옛날 유대인들에게 못지 않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도 유효하다.
유대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어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으므로 거룩한 자손이라
불렀다(스9:2, 사6:13). 그와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거룩하다고 인정되며, 한쪽 어버이만이
신자일지라도 거기서 난 자녀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결한 자손과 다르다고 사도는 확언한다(고전7:14)"
(p.401)
7. 예수님과 어린이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된다"(p.402)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을 빼놓은 것이 아니므로 이런 기사를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행16:15,32).
...참으로 세례의 제정 목적에 주의만하면 세례는 큰(성인)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p.404)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
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출20:6)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p.405)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10-16번은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 것입니다.
"재세례파는 할례와 세례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분리시켜서 공통점이 전연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이 두 표징은 서로 의미가 다르고 각각 포함된 언약도 아주 다르며, 어린이들에 대한 소명도
같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철저히 육적인 사람으로 그림으로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같이
만든다"(p.406)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육에 거하는 죄의 몸을 벗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른다(골2:11). 이런 말씀은, 세례의 실천과 진상은
곧 할례의 실천이며 둘은 똑같은 의무를 지녔다는 것이다"(p.407)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이 경박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우선 손에 닿는 것을 잡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들러붙어서는 일체 여러 가지 일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꾸
속을 수 밖에 없다"(p.408)
칼빈은 미혹을 당하는 자들의 약점을 잘 파악합니다.
비록 복음을 듣고 제법 안다고 하는 자들이 오늘날도 이렇게 미혹당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자들로 칼빈이 지적한 것들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조상 아브라함은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무할례 시대에 가졌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조상이 되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영예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방인들은 세례가 있으므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p.409)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혈통을 헛되이 믿는 것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맺으신 언약은 결코 수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완고하고 언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거룩하다고 부른다(롬11:16).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가정에서
맏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전히 완고해서 복음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p.410)
칼빈이 보는 유대인들의 구원은 일관성을 견지하지만 많은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할례를 받았기에 모든 유대인이 거듭났다는 것으로 보기에, 거듭난 자로서 그들의 받은 복을
상실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하고 있습니다(롬9:27).
이런 생각이 지나치면 모든 이스라엘(유대인)은 구원을 받는다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유대인(이스라엘, 구약 성도들)의 구원은 그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받습니다.
15. 약속은 비유적인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바울은 유대인들은 그 부모에 의해서 성화된다고 논하는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는 그 부모에게서 동일한 성화를 받는다고 가르친다(고전7:14).
사도는 유아들에게 새겨진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해석한다(엡2:11-13)"
(p.411)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왜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는 가에 대해 고대 저술가들은 주의 부활과 관련하여 생각했습니다.
칼빈 역시 그런 견해에 찬성하면서 하나 더 덧붙입니다.
칼빈의 여린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 8 일까지 미루신 목적은 아직 연약한 유아들을 생각하신 것으로서, 이는 갓난 핏덩어리
같은 아기에게 할례의 상처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p.413)
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부패가 그들에게 있다면, 오염된 것이나 부패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계21:27), 유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오염된 것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p.415)
이 주제에서 칼빈은 요한복음 3 장을 많이 인용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몰랐던 이유를 그 당시까지 거듭남이 없었고, 장차 오순절 이후에
일어날 일을 몰랐기에 그런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본 것은 그들과 너무도 다릅니다.
칼빈의 견해로 니고데모가 모른 이유를 몇 가지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 할례는 거듭남이다. 그러나 유아 때 일어났기에 모를 수 있다.
* 할례를 통한 거듭남은 세례를 통한 거듭남과 동일한 효력이 있다.
* 오순절 이후에 거듭남이 일어난다는 것은 할례를 몰라서 나온 것이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하여간 선택된 사람이 현세에서 불려가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성화되고 거듭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다"(p.416)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로
"설교와는 별도로 성령으로 마음속을 비추심으로서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주셨다"(p.417)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유아들은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며, 아직은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동일하다 - 중생의 씨앗)
우리는 할례도 중생을 의미했으므로 중생한 사람이 아니면 할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얼마든지
그들의 추론을 반박할 수 있다"(p.418)
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만일 그들이 장성해서 세례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갓 태어났을 때 그들에게 중생의
표를 주어 일평생 그 뜻을 명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들에게 새로워지겠다는 열의가
불일듯 일게 될 것이다"(p.419)
22.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이미 죄인이므로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서 자비의 소망을 빼앗으시지 않고, 오히려 확실하게 만드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실체보다 훨씬 낮은 표징을 그들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p.420)
23. 어른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고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할례의 표를 받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을 배워야 한다. 할례에 의해서 확인된 언약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그(이방인)는 민족적으로 외인이었기 때문이다"(p.422)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요3:3,5)
"물이란 말이 있다고 해서 이 귀절을 세례라 생각하는 것은 곡해이다.
성령 즉 믿는 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는데 있어서 물과 같은 일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간단하게 "물과 성령'을 "물인 성령"이라고 해석한다"(p.424)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세례는 멸시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27. 세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28.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없다.
29. 예수님은 성인 세례의 원형이시다.
30. 세례와 성만찬
고대 교회에서는 유아들에게도 성만찬을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키프리아누스와 어거스틴의 글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폐지되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한다는 표징이며, 중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그러나 성만찬은 유아기를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다"(p.429)
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32. 우리의 어린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대적 세르베투스와의 논쟁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에 31-32번은 분리해서 다루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