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사랑함의 폭은 얼마나 깊고 넓어야 할까요?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또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 희생하는 범위는 어느 정도일까요?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범위도 동일한
측정이 가능합니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아 선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유했던 모든 재산을 털어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역은 종종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진젠도르프 자신은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라비아 사업으로 인해
빈번히 재정적인 곤란에 부딪치곤 했다. 그의 개인적인 재정은 모라비아인들의 재정과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었다.
1760년 세상을 떠날 당시, 그는 모라비아 교회에 15만 파운드의 빚을 남겨 놓았다.
모라비아 인들이 이 빚을 갚는 데는 무려 40여 년이나 걸렸다"
(교회사를 통해본 성령의 표적, 하워드 스나이더, p.216)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공동체나 교회 혹은 선교회가 빚을 지면서 사역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빚을 지는 동안 하나님은 뭐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빚을 지게 하는 것이 타당한지 침묵하게 됩니다.
*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들을
데려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왕하4:1)
사역자는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많은 빚을 지다가 갚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빚을 준 사람은 받을 것이 없자 여인의 두 아들을 데려다가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이 문제가 다 해결되지만 사역자가 빚을 지는 경우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어디까지 사랑해서 헌신해야 할까요?
현금이 있는 것만 사용하고 없으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아니면 빚을 내서라도 고쳐야 하는 희생이 필요할까요?
"빚을 내서 어떤 희생을 치르러 하는 것은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 사마리아 사람은 우선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더 들어가는 비용은 다시 와서 갚겠다고 합니다.
빚을 지면서까지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한 것입니다.
빚을 지면서까지 이웃을 도와 본적이 없었는데 이런 주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디까지 일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돌아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