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SBS 요한계시록" 유튜브를 들으면서 선교단체의 성경공부가 어디까지
가야할지 생각해봅니다.
과거에는 큰 틀 몇개로도 운영되었다면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대부분의 큰 선교단체들은 자체적으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연구한 교재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더 깊은 가르침이 병행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가르치는 자가 혼자만의 지식에 심취하면 악영향을 끼칩니다.
'2018 SBS 요한계시록'을 듣다가 몹시 실망했습니다.
강사가 이필찬 교수의 책이 탁월하다는 평가는 전율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이필찬)가 전제한 요한계시록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의 저서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다가 차라리 읽지 않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그런 책을 탁월한 책으로 추천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요한을 거짓말장이로 만든 책이 최고의 책입니까?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약 ................
그의 책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무천년적 계시록 이해는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계시록 자체 해석보다는 주변적인 학문에 더 큰 영향을 받아서
실상 계시록 내에서는 별 의미없는 해석으로 일관합니다.
1. 묵시문학
무천년 신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 묵시문학을 연구합니다.
이필찬 교수 역시 이런 패턴을 밟습니다.
이런 분들은 역사적 전천년주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조지 엘돈 래드의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묵시문학과 계시록은 별 연관성이 없고, 구약의 묵시문학인 스가랴, 다니엘 정도만 참고해도 된다는 말>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 요한신학
무천년 신학자들은 묵시문학을 너무 무겁게 다루다보니 요한이 계시를 본 후 오랜 시간동안 연구하여,
주변의 묵시문학이란 틀을 사용하여 전달했다고 주장합니다.
WBC 요한계시록을 주석했던 아우네 역시 그런 주장을 합니다.
계시를 받은 후 기록까지 10-20년 정도 시간적 간격을 둡니다.
요한이 이해한 묵시문학이란 틀과 그 속에 담겨진 요한신학(개인적)을 찾아내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계시록을 시작하기도 전에 파김치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필찬 교수 역시 이런 스토리를 수용하기에 시작부터 불완전한 형태를 가집니다.
< 요한이 환상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환상을 보자마자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묵상하고 정리해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한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요한이 동원했던 독특한 문학 기법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p.25>
계시록 자체를 통해 볼 때 요한은 자신의 신학이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묵시적 기법을 사용하려고 애썼던 것도 전무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보았던 것, 들었던 것, 보고 들었던 것>이라고 100 번 넘게 사용합니다.
자신이 밧모섬에 갇힌 이유를 제외하고는 모두 받은 계시를 충실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요한 계시록 해석에 가장 큰 장애물은 묵시문학과 요한 신학입니다.
이 두가지 장애물은 성도로 하여금 계시록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나쁜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3. 접근 방법의 실수
무천년 신학의 대부격인 윌리엄 핸드릭슨은 요한 계시록이 7막으로 되어 있다고 전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재림까지 7막 안에서 반복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핸드릭슨 본인도 어떤 곳에서는 그렇지 않음으로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상하게도 무천년신학은 이런 구조적 접근을 선호합니다.
불완전한 구조인데도 그것이 정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조가 본문을 해석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4. 본문이해
계시록 해석의 마스터 키라고 할 수 있는 삼위 하나님이 재림 때 하시는 일에 대해 난해한 입장을 취합니다.
성부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곳을 각색합니다.
*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 계1:4,8, 4:8>에서 장차 오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부분에 대해서 어이 없는 접근을 합니다.
<장차 오실 이 라는 말은 (요한이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만든 말)임을 알 수 있다 - p.31>
요한을 아주 나쁜, 계시를 바꾸어 버린 자로 만들었습니다.
해석의 최종 권위가 요한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로 만들었기에 가능한 접근입니다.
일곱 교회의 서두에 나타난 언어들 역시 예수님이 말한 것이 아니라, 요한의 작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와 같은 연결들은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이면서 각 교회들에게 주어질 메시지들의 내용을
염두해 두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 p.55>
네 생물에 대해서도 사실적 개념보다는 문학적 기교로 봅니다(p.85).
요한은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자기 입맛에 맛게 손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요한은 이러한 공통 주제를 중심으로 스가랴의 두 메시지들을 조합하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다> - p.86
6-19장에 나오는 심판 시리즈 역시 사실적 근거에는 관심이 없고 문학적 효과를 위해 사용했다라고 말합니다(p.89)
심판 재앙들에 대하여 그 일어나는 시점을 당대의 로마제국부터 재림까지 폭 넓게 적용합니다.
즉 종말에 이르러 발생할 사건으로 보지 않으며, 무천년 신학의 패턴인 사건이 반복하여 모든 시대에 발생한다고 봅니다.
재앙의 유일성을 사실 제거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해석하는 것은 신학적 전제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천년 신학은 웬만해서 계시록을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지못해서 다룬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책을 끝까지 읽는 분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계시록 해석을 이렇게 망가뜨리면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무천년적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의 빛을 가리고 있는 신학이 우리 교회들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이 눈에 선하기에
심히 염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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