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길 교수는 고신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계시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무천년주의자이면서도 그들이 자주 실수하는 부분을
과감하게 버리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으로 접근합니다.
간단하게 이 책의 장점과 단점을 소개합니다.
1. 장점
➀ 순수한 목적이 선명하다.
"때로는 학적으로 논의하고 논증하기도 하고, 때로는 국내외에 출판되어 있는 책들의
견해들을 소개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드러내고,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하기 위함이다"(p.6)
➁ 계시록을 묵시가 아닌 계시로 해석한다 - 매우 중요함
"계시란 말은 원래 베일을 벗겨서 드러낸 것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리려고
주신 것이다. 요한은 이 용어로 문학 장르로서의 소위 묵시록(apocalypse)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의 책을 '예언 또는 예언의 책(22:7,10,18-19)으로 말하기 때문이다"(p.14)
➂ 요한신학을 배제한다 - 이것 또한 매우 중요함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의 사상이나 생각을 적은 것이 아니다. 요한이 구약(성경)과 외경 책들을
펼쳐 놓고서 당시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서 적은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들었으며, 그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
우리는 이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p.16-17)
➃ 지나치게 신경쓰게 하는 외적인 것들을 간략하게 정리했다.
* 저자 - 사도 요한
* 기록시기 -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주후 95-96년경
➄ 계시록 1:7절을 명백하게 재림으로 본다.
"이필찬 교수는 (1장) 7절의 '오다(애르케타이)가 현재형임을 근거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역사적 오심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여기의 애곡하다를
회개로 보고, 재림 때까지 반복해서 일어날 일들로 보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여기의
'오다'를 재림으로 보지 아니하고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일어나는 상시적 오심'으로 본다.
그러나 '오다' 동사의 시상이 현재임을 들어 초림으로 보는 것은 문법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헬라어에서 현재는 종종 미래를 대신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다.
특히 '오다'는 동사는 현재로써 미래를 나타내는 경우가 아주 많다.
예를 들면, 눅12:40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에르케타이)" ; 요4: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에르케타이) 하지 아니하느냐" ;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 온다(에르코마이)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p.50-51)
2. 보완
❶ 무천년주의를 안전한 틀로 놓고 접근한다.
"우리는 어떤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구절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문자적 의미로 볼 것이며, 상징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상징적으로
볼 것이다.
문자적 의미냐 상징적 의미냐 하는 것은 오직 그 구절을 문맥에서, 그리고 계시록 전체에서,
나아가서 성경 전체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결정할 성질의 것이다"(p.39)
이런 올바른 원리를 제시했음에도 저자가 가진 무천년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❷ 요한에게 계시를 전달해주는 주체가 <천사>라고 한다.
계시의 영은 천사가 아니라 성령이다.
"1절하에서는 계시의 전달 과정을 구체적으로 말해 준다.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이것은 다시 <천사>를 통해 사도 요한에게 주어졌다.
(하나님 → 예수님 → 천사 → 사도 요한)"(p.43)
❸ 세 번씩 강조한 것들을 지나침입니다.
그 중 하나가 '성부의 오심' 입니다(계1:4,8, 4:8, 11:17, 16:5).
재림이 언제 일어나는지, 하늘의 존재들을 데려오는지, 하나님의 성(새 예루살렘 성)의 도래 때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계21:3)"(p.47)
❹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열심있는 사랑'으로 본다?
좀 더 심도 깊은 연구가 부족하다.
"처음 사랑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을 때의 열심있는 사랑을 의미한다"(p.74)
❺ 생명책에서 흐리다(지우다)는 의미를 구원의 상실이 아닌 견인을 의미한다?
흰 옷을 입었다는 말은 이미 의로워진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흐리다'는 단어는 원어상 '지우다'는 뜻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곧 구원의 확실성을 말한다"(p.91)
❻ 계3:10절의 시험의 때를 면해주겠다는 말이 대환난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환난과 심판재앙(인, 나팔, 대접 재앙)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판재앙을 대환난으로 보는 큰 실수를 범했다. 이런 패턴은 몇 곳을 제외하고 반복된다.
" 이 시험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물론 마지막 종말 직전의
<환난의 때>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를 지키겠다는 말씀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존재하던 동안에 소아시아 일대에 임한 <핍박의 때>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느 <핍박>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p.94)
❼ 저자의 천국(새 예루살렘 성, 하늘 보좌, 낙원)환상은 지나치게 상징적이다.
보좌도 24장로도, 하나님의 형상도 상징으로 본다.
"요한이 본 것에는 물론 실제 자체를 본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상징을 통해
영적 진리를 보여 준다...보좌는 하나님의 왕권, 주권 또는 통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으므로(딤전6:16; 출33:20)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24장로도 문자로 취할 수 없다. 왜 24 장로들만 있는가?
왜 목사는 없는가? ...여기 24 장로는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구약과 신약의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p.101-104)
❽ 첫째 인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로 본다?
인, 나팔, 대접 재앙들은 모두 하나님이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심판 재앙을 담고 있다.
"첫째 환상은 복음 전파를 나타낸다...그 말 탄 자는 그리스도이다"(p.121)
❾ 둘째 인을 '복음 전파에 따른 성도들의 핍박'이다?
인, 나팔, 대접 재앙들을 심판재앙이 아닌 환난으로 보는 것은 계시록의 흐름과 역행한다.
"둘째 인 환상은 종교적 핍박을 나타낸다...이 말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고 한다(4절). 이것은 핍박을 의미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핍박이 있다"(p.126)
❿ 십사만 사천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로 본다?
저자는 계시록의 사건들을 초림과 재림 사이에 반복되어 발생하는 것들로 보기에 십사만 사천 역시
특정한 시대가 아닌 <모든 시대>로 본다. 이런 견해는 애굽의 열 가지 재앙 때 열 가지 재앙도
모든 시대에 발생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의 인치심은 모든 시대가 아니다(계8:13).
재림을 앞두고 심판재앙이 실행될 때 성도들을 불신자들로부터 구별하여 보호하기 위해 인치신다(계9:4).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 7장의 십사만 사천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의 총수' 또는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의 충만한 수'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들 중에서와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총수로 보아야 한다"(p.136)
⓫ 흰 옷 입은 수많은 무리들도 <신구약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다?
저자에게 계시록은 특별한 책이 아니다. 그저 초림부터 재림 사이에 반복되는 사건일 뿐이다.
"여기의 큰 환난은 마지막 종말 때의 특정한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흰 옷을 입은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신구약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면, 여기의 큰 환난도 특정한 한 시대의 사건만
가리킬 수는 없는 것이다...따라서 여기의 '흰 옷 입은 자들'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 전체를 가리키며,
특별히 마지막 시대의 성도들만 가리키지는 않는다"(p.140)
⓬ 심판 재앙들은 이 세상의 역사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첫째 나팔 재앙 때는 '피 섞인' 우박과 불이 쏟아졌는데, 과연 피 섞인 우박이 내린 적인 한 번이라도
있는가? 재앙도 상징을 수반하는가?
"나팔 재앙들은 이 세상 역사 가운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p.146)
⓭ 악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심판 재앙을 수행하는가?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재앙을 통해 저자의 정리되지 않은 성경관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마귀와 그 사자들이 악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가?
모든 심판재앙들을 수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이다.
특별히 다섯째 나팔(황충재앙)에 등장하며 수행하는 천사들에 대한 대혼란이 드러난다.
선한 천사와 타락한 천사들이 서로 뒤엉켜 있다.
"황충의 재앙은 마귀의 권세에 의해 이 세상에 행해지는 '큰 환난'(?)을 나타낸다...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는 사탄 곧 마귀를 뜻한다...
(계9:4절의 명령을 행한 자는) 이 명령을 내린 주체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하나님이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천사일 것이다"(p.152-154)
"악령들의 우두머리(왕)는 무저갱의 사자라고 불린다.
...여기서는 무저갱에서 파송한 자 곧 마귀, 사탄을 의미한다"(p.158)
⓮ 이억의 마병대가 사탄의 세력인가? 말들도 상징인가?
마귀가 악인들을 회개하라고 재앙을 내리는가?
하늘에 있는 불말에 대한 묘사가 여러 곳에 있는데 곧바로 상징이라 한다.
(왕하2:11, 6:17, 사31:3, 계19:14)
"이만만은 2억인데 상징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 곧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엄청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이 말(馬)이 문자적 의미의
말(馬)이 아님을 알 수 있다"(p.159)
⓯ 천사는 하찮은 존재인가?
"(계4:8절 관하여), '전에도 계셨고'라는 말부터 시작하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을 보면 이 생물들의 시간관은 기계적임을 알 수 있다.
태초부터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자기 임무를 수행한다"(p.107)
"천사들의 찬송을 살펴보면 구원에 대한 감사 찬송이 없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구원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p.117)
"천사는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는 영에 불과하다"(p.164)
⓰ 두 증인은 모든 성도들이고, 모든 성도들은 선지자들이다?
두 증인을 상징으로 해석하기에 두 선지자로 말씀한 부분도 결국 모든 성도들이라고 주장한다.
"요한의 형제들 곧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선지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창20:7).
이들은 성도들 중에서 특별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계11:10).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두(형제, 선지자) 표현은 모든 성도들,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p.390)
⓱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계11:13)
변종길 교수는 이 구절을 회개가 아닌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로만 본다.
그러나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보면 이 구절은 회개를 의미한다(계14:7).
"여기에 '회개한다'는 말도 없고 '구원받는다'는 말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피상적인 고백을 말한다"(p.185)
⓲ 일곱째(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재림한다는 확신이 없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일곱째 나팔 소리가 울리자마자(계11:15) 주의 재림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변종길 교수는 초점을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로 흘러간다.
"왕노릇하시도다(에바실루사스)'는 원어에 의하면 아오리스트(aorist)로서 '왕노릇하셨도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글역 성경에 보면 거의 다 현재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심판 날의 시점에서 지나간 세상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렸음을
고백하는 말이다"(p.188)
변교수는 이곳에서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일곱째 나팔이 울리자마자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과거).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가시적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했음을 피해간다.
또한 19:6절의 통치하시도다 역시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다.
재림으로 통치가 가시적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른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심판의 결과로 하나님의 통치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셨기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시고 세상 나라가 주의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셨기
때문에 마침내 의로운 심판이 행해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바벨론 심판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지나간 세상 역사 기간 동안에, 곧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통치하셨음을 고백하고 찬송하는 것이다"(p.300-301)
계시록 20:4절에서도 역시 동일한 문제가 있다.
부활한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렸다는 것에도 부활을 빼버리고 초림부터 재림 사이의
통치로 바꾸었다. 재림과 함께 성도들이 <부활하여> <가시적으로> 주님과 함께 통치하심을
뺀 나머지 주장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혼이 '살아난 것'(에제산)은 이 지상에 있을 때 '중생'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요3:16, 5:25, 6:54).
그 결과로 그 영혼들은 낙원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다"(p.333)
그러나 이곳 세 곳 모두 이전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있었기에 재림을 통해 통치가 시작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 곳 모두 재림이 되어 세상 나라가 <가시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을 통해 내면적으로 펼쳐졌다면, 재림부터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가시적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다니엘 역시 동일한 설명을 한다.
※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도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단7:26-27)
⓳ 일곱 대접 재앙에 대한 정리가 약하다.
재림 후 쏟아지는 재앙으로 보면서도 순서에 있어서 혼란이 있다.
"(셋째 대접 재앙 - 계16:5) 여기에 '장차 오실 이'가 빠진 이유는 이미 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마지막 종말의 심판임을 보여 준다"(p.246-247)
⓴ 마지막 일곱째 대접 재앙이 있은 후에도 살아 있는 악인들은 누구인가?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접 재앙들의 순서를 바꾼다.
재림 때 모든 악인들은 다 죽어야 한다는 전제가 대접의 순서를 바꾸었다.
"마지막 심판 재앙이 내린 후에도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비방한다는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은 최후 심판이 아니란 말인가?
...흐레이다너스(저자가 제일 중심으로 보는 주석가)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p.257)
저자의 이런 탄식은 천년왕국 문제를 다루면서 다시 재기된다.
"그러면 20장 3절의 사탄이 미혹할 '만국'은 누구며, 8절의 '땅의 사방 백성'은 누구란 말인가?
이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먼저 부활한 성도들 또는 변화된 성도들의 자녀들 중에서 왔다고 하는
이상한 주장을 하게 된다"(p.315)
저자 변종길 교수의 이런 의문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해결책은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계시록의 환상은 꼭 시간적 순서를 보여 주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재앙' 후에 '사람들의 비방'이 나오는 것은 '시간적'으로
첫 번째 일 후에 두 번째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첫 번째 것을 먼저 보여 주신 후에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보여 주신 것이다"(p.257-258)
하지만 이런 답변은 본문을 벗어났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비방한 이유가 마지막 구절에 기록되었다.
무게가 한 달란트(34 킬로그램)나 되는 우박을 내려 악인들이 맞았기에 나온 반응이다.
▣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계16:21)
㉑ '큰 음녀'가 '악한 세상'인가?
"큰 음녀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람을 유혹하는 '악한 세상'을 나타낸다.
당시의 세상은 로마였지만, 단지 로마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서
나타나는 '악한 세상'이다.
그러나 큰 음녀는 결코 세상 자체가 아니다.
짐승(적그리스도)에 의해 파괴되기 때문이다(계17:16).
또한 마지막 일곱째 대접 재앙에 의해 파괴되는데, 큰 성 바벨론과 세상 모든 도시들의 파괴가
선명하게 다름을 보여준다.
▣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계16:19)
㉒ 짐승(적그리스도)도 세상 권세, 세상 나라, 세상 제국인가?
다소 모순적인 주장이 계속된다. 적그리스도도 음녀도 모두 세상이라면 세상이 세상을 파괴하게 된다.
짐승과 음녀는 서로 다르다.
"그렇다면 이것(짐승)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사탄의 조종을 받아 하나님 백성을 압제하고 핍박하는
세상 권세, 세상 나라, 세상 제국이다"(p.268)
음녀를 세상으로 보는 자들은 이상한 표현을 한다.
저자는 이런 짐승이 음녀를 파괴하는 것을 마운스의 의견을 통해 표현한다.
"이것은 마운스(Mounce)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의 자기 파괴적 권세'를 말한다.
달리 말하면 악의 세력들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파괴적 행동을 할 것을 뜻한다"(p.278-279)
㉓ 재림 때 예수님과 함께 내려오는 군대가 성도들인가?
저자는 예수님이 타신 백마를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p.304).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하늘 군대를 성도들로 본다.
이것은 재림의 상황을 오해한 것으로 이 때 성도들은 부활체가 아니라 아직 영으로만 존재한다.
모든 성도들은 재림으로 인하여 그 몸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주님을 공중에서 영접하는 것에
집중한다(살전4:17).
"그러나 본장 19절의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킨다"는
표현을 볼 때, 이 군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로 보는 견해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p.305-306)
㉔ 재림과 함께 마지막 심판으로 우주가 불타 버릴까?
저자는 무천년주의 신학을 가졌기에 재림과 함께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고, 백보좌 심판도 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주가 불타야 하는 이유가 없다.
"(새들에게 펼쳐질 큰 잔치의 초대가 상징인 이유) 왜냐하면 그 때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공중의 새들을
포함해서 우주 전체가 불에 타서 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벧후3:10, 마24:35, 계6:14, 20:11)"(p.308)
㉕ 천년왕국은 재림 후 펼쳐지는 시간이 아니라 초림과 재림 사이의 반복이다?
무천년주의 신학 프레임으로 보기에 두 번에 걸쳐 표현된 '살아서(에제산, 4,5절)'을 부활로 보지 않는다.
거듭난 성도들이 하늘에서 주님과 천년동안 통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20:5절의 악인들은 거듭나지 못해서
주님의 통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목베임을 받은 자들도 초림부터 재림 사이의 성도들로 본다.
"즉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낙원에 있는 성도들의 영혼들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다. 그들의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서 낙원에서 안식하고 있다"(p.331)
"영혼이 '살아난 것'은 이 지상에 있을 때 '중생'에서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결과로 그 영혼들은 낙원에서 '생명'을 누리고 있다"
변종길 교수가 생각하는 낙원은 무엇일까?
새 예루살렘 성이 아닌 또 다른 장소인가?
다른 곳에서 낙원과 생명수 강, 생명나무 그리고 그 열매들까지도 성령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명수의 강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처럼 생수의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다양한 생명의 역사를 상징한다...그리고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힌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의 다양성,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양한 생명의 역사가 있을 것을
말한다"(p.383)
㉖ 무생물인 새 예루살렘 성이 어린 양의 신부인가?
저자는 계21:10절을 오해해서 새 예루살렘 성을 신부로 본다. 전형적인 무천년주의자들이 범하는 실수이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서 혼인잔치를 벌이는 신랑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들을 보지 못한다.
그 결과 재림의 하이라이트인 새 예루살렘 성을 없애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문자적 의미의 돌과 보석으로 된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이런 것들은 다 교회의 모습을 묘사하는 상징적 표현들이다"(357-358)
여기서 큰 혼란이 보인다. 저자는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들을 묘사하는 상징으로 보면서도 어정쩡하다.
새 예루살렘 성과 천국을 동일시한다. 어느 곳은 상징으로 어느 곳은 장소로 표현한다.
"물론 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 성 곧 영원한 천국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p.373)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천국에 대해 장소가 아니라 통치나 주권적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데,
저는 이 개념에 한계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천국에 장소적 개념이 분명히 있음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p.505)
3. 평가
위험을 피하는 것은 좋은데 너무 조심스럽게 쓰지 않았나 생각된다.
책을 통해서 재림에 대한 확실한 이정표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뚜렷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다수의 주석서들의 저자들과 대화를 나누었겠지만 현 시대는 인터넷을 통해 활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점들이 있는데 놓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앞선 무천년주의자들의 책들과 별반 다를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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