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서철원 교수가 신학지남 1999년 겨울호에 기재했습니다.
천년이 끝나며 또 새로운 천년이 열리는 시점에서 20세기(1900년대) 신학의 흐름을
명확하게 짚어줍니다. 더 나아가 20세기 신학의 틀을 놓았던 19세기 신학까지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서철원 교수는 서울대와 동 대학원에서 오랫동안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현대신학을 깊게 통찰할 도구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을 통해 서구 교회들이 쇠퇴하고 혼란에 빠진 것을 애통해 합니다.
또한 이런 흐름을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망가지는 개혁교회까지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1. 새 방향의 설정
서철원 교수는 20세기 신학을 슐라이엘마허가 세운 자유주의 신학 곧 내재신학의 반동으로
태동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임마뉴엘 칸트 철학과 낭만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신학을 시작하는 것에서 완전히 돌이켜, 인간의 종교경험에서 모든 신학을
시작하였고, 종교경험으로 신학의 기준을 삼았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 수 없다고 칸트가 설정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물자체가 되어
경험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영역인 종교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면 초자연과 초월은 다 배제되고, 모든 것이 내면화된다"(p.53)
"...이렇게 슐라이어막허는 인간의 종교경험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 표준으로 삼으므로 철저한 내재신학
곧 자유주의가 되었다...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하였는데, 절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 의존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p.53)
신학자들의 책들은 대체로 두껍고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누가 정통이고 자유주의자들인지 아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의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철학을 기준으로 접근한 신학자들 곧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자들은 예수를 어떻게 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간 본성을 개발하여 신의식을 발전시켰다.
무한한 신의식에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의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기 때문에
구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일뿐이다"(p.53)
자유주의자들이 바라 본 예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였기에
훗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었고,
후에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에비온파처럼 예수는 훌륭한 선지자였는데,
하나님이 그를 높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슐라이엘마허나 칼 바르트 그리고 물트만, 틸리히, 몰트만까지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거장이란 자들의
특징이 모두 동일한 관점을 지닙니다.
2. 새로운 성경해석법
바르트는 슐라이엘 마허의 신학에 대한 반발로 출발합니다.
인간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았던 슐라이엘 마허에서 벗어나 신학을 성경 말씀의 온전한 형태로 세우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을 읽고 특히 칼빈의 신학을 읽고, 키엘케골의 저술들을 읽으며 개혁신학으로
돌아가야 할 것으로 여겼다"(p.54)
바르트가 로마서를 주석함으로써 무명의 시골목사로서 학위도 없었지만 괴팅겐 대학의 개혁신학의 교수가 되었다.
슐라이얼 마허가 초월을 인정하지 않는 것에 반대하며 수용합니다. 그러나 그런 수용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여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성육신,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부활, 재림, 구주 등을 그대로 보존하되, 그 의미를 달리 혹은
변증적으로 해석하기로 하였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육신은
신화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 내에서 나서 살다가 죽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창조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눈에 두셨다. 그를 통하여 세상을 다시 완전하게 창조하기로 작정하셨다"(p.56)
바르트의 예수 이해는 에비온파와 유사합니다.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수행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높이어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고 구원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그에게서 신성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바르트 신학은 궁극적으로 그가 반대한 슐라이엘 마허와 유사합니다.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것들은 실질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봅니다.
성경적 용어를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신학사는 교리 혹은 성경의 해석사이다. 20세기 신학은 글자대로 성경에 있는 내용을 그 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용은 전적으로 바꿔서 새 뜻을 갖게 한 신학 활동이었다...그러나 20세기 신학은 실존주의로
신학하므로 성경의 내용들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여 전혀 다른 신학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근본은 19세기 신학과 동일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전체로 다 부정하는 작업이 20세기 신학의
해석작업이었다"(p.58)
3. 칼 바르트(1886-1968)의 변증신학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슐라이엘 마허의 신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슐라이얼 마허에 대한 반작용으로 바르트의 신학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는 내재 신학이어서 신학의 모든 재료들을 다 인간의 종교경험에서 끌어왔다.
하나님이 초월자이면 경험과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모든 것을
도출하였다...하나님이 인격이요, 창조주임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란 절대자가 있는 것처럼
의존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종교이다. 신학은 이 인간의 종교감정 혹은 종교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합니다.
초월을 인정하며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초월적 존재이면 그의 말씀도 책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늘 새롭게 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책에 매여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시비를 없애려고 하였다.
이렇게 바르트는 그의 첫 작품인 로마서 주석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전통이란 신학도 함께 비판하였다"(p.59)
4.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의 비신화화 작업
신학은 전제를 바탕으로 펼쳐집니다. 불트만이 생각하는 신학은 먼저 교회가 만든 성경을 다시금 올바르게 돌려놓아야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는 스스로를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지 않았는데 교회가 필요에 따라
그렇게 만들었고, 많은 말씀들 역시 예수의 말로 바꾸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된 배경이 있습니다.
불트만은 바르트처럼 변증신학을 하였지만 헤르만 궁켈에게서 배운 양식비평의 방식을 취하여 이방종교로부터 온 것들을 제거하기로 작정합니다.
불트만의 신학의 평가기준은 현대인입니다.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을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철학입니다.
"이런 것들(초자연적 사건들 - 성육신, 부활 등) 다 신화이다. 이런 신화는 현대인들이 받지 않고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다 비신화화해야 신약의 사신을 현대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불트만은 신약을 비신화화기로 하였다.
이 비신화화는 근세신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막허가 시작하여 체계화하였고, 칸트가 설정한
프로그램을 완성한 것이었다...이 인간 이해를 현대 실존주의 특히 하이데커의 언어로
번역하므로 현대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비신화화는 실존주의적 해석을 위한
예비단계였다"(p.63)
불트만 신학의 기저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구자유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트만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약은 선포의 기록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p.64)
5. 폴 틸리히(1886-1965)의 존재신학
틸리히는 하이데커가 실존철학을 바탕으로 한 실존주의를 신학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연결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인 신으로 보지 않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보지 않으며,
존재자체로 보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실존에 종속된 한 인간으로 보았으며, 다만 그는 실존에 굴복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까지
존재의 지반 곧 존재 자체에 동참하였기에 새존재로 또 새사람 그리스도라고 보았습니다.
6. 로마교도 카알 라아너(Karl Ranher, 1904-1984)의 신학
라아너는 종교다원주의를 교리화했으며 바티칸 공회의의 신학을 결정했습니다.
"신은 존재자체이다. 신은 절대적 존재이고 파악불가한 실체로서 존재자체이다..
..이런 존재자로서의 신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내면에서 접촉하여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자기의 생을 받으면 유신론자이고,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p.66)
라아너가 생각하는 예수는 누구일까요?
예수는 역사내에서 나서 살다가 죽으므로 끝이 난 존재입니다.
7. 위르겐 몰트만(1926- )의 정치신학
서철원 교수는 몰트만을 정치신학자로 봅니다.
20세기 신학에서 몰트만의 특징은 실존주의적 신학 토론을 종식시키고 교회의 눈을 사회정의 문제로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막시즘을 기독교 종말론의 눈으로 보면서 미래에 전개될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미래 세계를 소망하는 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종말론이 말하는 재림 후에 전개될 미래 세계를
뜻하지 않는다. 지금 현존의 부조리한 체계를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이다...그가 기독교 종말론을 말해도 그런 종말, 도식, 그리스도가 천사들과 함께 와서
세상을 심판하는 것 등은 다 신화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p.67-68)
몰트만 역시 자유주의자들처럼 성경의 역사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신학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전혀 다른 해석으로 치닫습니다.
8. 20세기 신학의 반성
서철원 교수는 다섯 명의 20세기 신학자들을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바르트는 성경에 가깝게 해석해도 전통적 신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입증하였다.
불트만은 성경의 내용이 신화적 세계관에 의해 구성된 신앙의 산물이었다고 성경의 진술을
글자대로 주장하므로 받을 수 없고, 비신화적으로만 이해하도록 확정하였다.
틸리히와 라이너는 신을 완전히 비신화하여 존재자체로 만들므로, 인격적 신과 창조주 신앙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몰트만의 신학은 내세와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제의 개선을 위한
작업임을 확립하였다. 20세기 신학에 의해 기독교의 자기 해체가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이다"(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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