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생존했던 시기(1509-1564)의 제네바는 약 1만명의 사람이 거주했습니다.
거기에 교회는 단 3개뿐입니다.
당시의 교회들은 개교회 목회자들의 개별적인 목회라기 보다는 유기체적인 형태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한 달에 최소 한 번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사정으로 참여치 못한 성도들은
다른 교회들의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행해지는 성찬식은 각각 교회마다 날짜가 달랐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와 유럽의 목회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했지만 자신은 총장이 되지 않았고, 그의 제자 베자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습니다.
바울은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고 세웠지만 더 열악한 곳만 찾아 떠났고, 그 후임으로
신뢰할만한 인물들을 세웠습니다.
칼빈 역시 바울의 뒤를 따라갑니다.
칼빈 - 신학자이며 목회자 - 이란 인물을 보면 그는 단순히 엄청난 지식과 지혜의 은사를
받은 자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유럽을 가슴에 안고 모든 물질을 사람과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남겨진 돈은 소액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무덤마저 아무런 묘비마저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칼빈을 따르는 개혁교회라면 이런 정신을 추구해야 합니다.
단순히 이론만 따른다면 진정한 개혁교회라 부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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