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말할 때 늘 따라오는 구절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두세 곳의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히5:5)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천사나 사람처럼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히1:5) 신적존재입니다.
천사는 피조된 존재이면서도 사람처럼 자손을 통해 번식하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졌기에 자신 스스로 타락에 대한 대가를 치르었습니다.
그 결과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욥1:6, 38:7).
사람은 자손의 번식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인간적 관점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이해하려 하기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오고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낍니다.
둘째로 오늘(세메론)이란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이 땅이 아닌 새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는 결코 내일이나 어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빛이 사라지는 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계21:25).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지배합니다.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필요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21:23)
그러므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알파와 오메가(계1:8)라 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통치하는 분으로 묘사합니다(시146:10).
셋째로 낳다(겐나오, 출생하다. 해산하다)입니다.
낳다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의 출산과정을 통해서는 결코 설명이 불가합니다.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었지만 시원한 설명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비라는 말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이 부분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곳은 아담으로부터 하와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만들 수도 있었지만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잘 이해시키기 위해(?) - 개인적인 생각 - 순서를 따라 나오게 하셨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여자를 아담으로부터 나오게 한 것입니다(고전11:12).
여기에 단순히 나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질서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가운데서도 질서가 있습니다.
*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온 것 같이 예수님도 아버지께로부터 나왔습니다.
하와가 갈빗대 하나로 지음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계셨습니다.
이해시키기 위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형태입니다.
이 부분은 성령을 이해함에도 도움이 됩니다.
성령께서 언제, 어떻게 발출되었느냐에 대한 지혜가 동일하게 나옵니다.
성령은 만들어진 영이 아니라 처음부터(영원전부터) 하나님 안에 거했다가 나오셨습니다.
성자와 성령은 모두 아버지 안에 계셨다가 나오셨습니다.
낳다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을 통해 지혜를 얻으며 삼위 일체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성자나 성령이 만들어지거나 신성의 결함을 지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니케아 회의를 통해 전해진 귀한 결론들은 우리의 이해에 큰 도움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시다"
"신성으로는 시간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으며"
인간의 언어와 표현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묵상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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