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대가로서 칼빈의 생각을 나누는 것은 매우 유익하게 보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중생의 역사가 있었을까요?
즉 성령의 역사로 그들은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거듭났습니까?
칼빈은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칼빈)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즉 이전에 중생한 교부들(구약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 은혜를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다른 근원으로부터 그들에게 이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음속으로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은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으로부터 율법으로 이전된 은혜였다"(계약신학과 그리스도, 팔러 로벗슨 저, 김의원 역. p.298)
저는 칼빈이 내린 결론을 읽으면서 여러 번 생각했습니다.
① 구약의 예표로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속죄제사의 효과가 없는가?
② 구약 성경에서 율법 이외의 성령을 보지 못했는가?
③ 구약성경은 복음이 아니었는가? 구약 이스라엘이 받은 말씀은 복음이 아니었던가?
④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구약성도들에게 이전되었는가?
그 방법은 무엇인가?
구약성도들의 중생에 대한 것이 성령이 하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연설명이 더 어렵습니다.
신약성도들은 성령을 통해 거듭남(중생)이 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구약성도들은 근원이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복음으로부터 율법으로 이전된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기대 속에서만이 옛 계약의 희미한 형태가 새 계약의 능력 있는 실재에 참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p. 299)
구약 성도들은 "기대 속에서" 참여가 가능하다고 보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칼빈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대는 누가 구약성도들에게 부어주는 것일까요?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까?
만일 여기에 대해 <예>라고 한다면 그 순간 그의 전제(전적타락)는 산산조각이 납니다.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금 질문을 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성령"은 구약성도들에게 무슨 일들을 하셨는가요?
구약 성도들에게 성령을 빼 버리면, 그들의 중생(거듭남), 회개, 믿음, 성화, 영화에 대한 아무런 답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구약을 전혀 다른 성경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을까요?
구약 백성들의 <풍성한 행복함>에 대해 그 근원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 채 우리와 전혀 다른 <무거운 율법을 짐지고 가는 성도>로
만들고 맙니다.
*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 하리이다(시5:7)
* <이스라엘> 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 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33:29)
왜 구약성도들을 행복한 사람,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이라 표현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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