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성경 이모저모

12.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

오은환 2013. 9. 29. 18:55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4:16)

 

<또 다른 보혜사>를 간략하게 이야기 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낸 성령의 이름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약속하신 성령>이라 합니다(24:49, 1:4, 2:33).

보혜사(파라클레토스)는 보호자, 변호자, 조력자, 위로자, 상담자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논란이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해석상의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런 차이는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는 곧 구원론과 직결됩니다.

신학교에서 구원론은 성령론 안에서 다뤄집니다.

그만큼 구원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1. 보혜사(편의상 원 보혜사)와 또 다른 보혜사(약속하신 성령)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아버지께 받아서 보낸 성령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이 보내신 성령을 <약속하신 성령>이라 했습니다(2:33).

오순절 이후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 함께 하시고 내주하신 성령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합니다.

이런 질문을 해 보았으면 합니다.

 

<원 보혜사>는 누구입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원 보혜사를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 생각됩니다.

성부 하나님이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냈다고 이해합니다.

언뜻 보면 그럴듯합니다.

우리가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성령의 담지자란 말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을까요?

 

구약성경 가운데서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이해 결핍에서 기인합니다.

신학자들은 구약의 성령의 활동에 대해 매우 제한적으로만 봅니다.

일부는 제한적으로 보고, 대부분은 구약시대 성령의 활동에 무관심 합니다.

구약 백성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다고 보기에 이런 어려운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들은 어떻게 메시지를 이해했을까요?

 

여기에 대해 신학자들은 들어보지 못한 것을 꺼내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담지자였기에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직접 줄 수 있었다는 이상한 논리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16:16) 역시 그렇게 찾으려 합니다.

산상수훈을 들었던 청중들 역시 그렇게 보려 합니다.

 

성령이 없이 산상수훈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논리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던 구약 백성들을 산상수훈과 전혀 관계가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산상수훈은 구약백성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고(성령이 없기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청중들과 신약백성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하는 이상한 견해입니다.

 

그러면 원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원 보혜사는 구약백성들과 함께 했던 아버지의 성령(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신)입니다.

마태는 이런 상황을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알려줍니다.

* ...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12:18)

* ...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42:1)

 

원 보혜사는 아버지의 영 즉 내 영이라 말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 역시 계시록에서 자주 언급합니다.

자신이 가진 성령은 곧 아버지께서 주신 성령이라 합니다.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3:1)

*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 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6)

*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4:5)

 

구약 백성들과 함께 하며 위로하였던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이제는 예수 안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 완전한 복음과 함께 증거 되는 것입니다.

 

2. 구약의 성령 즉 원 보혜사(아버지의 성령)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신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견해에 대해서 일치합니다.

 

1) 성령은 창조사역에 관여하였고 그 피조물들을 지탱하고(섭리) 계신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이 구절을 근거로 창조의 영으로서 성령의 활동은 시작 됩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시편에서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주의 영을 보내서 그들을(우주만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

 

2)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고 신약백성들을 예비하신다

구약의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고 신약백성들(이방인의 구원)의 태동을

예비하십니다. 이 부분까지는 대체로 일치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성령은 그들의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합니까?

 

3) 성령은 구약 백성들 가운데 내주하시고 그들을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소수의 학자들이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주장 역시 아직까지 미미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된다면 이런 견해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 역시 성령을 거스른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4:30)

 

근심하게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성령의 음성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

*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 하게 하였으므로...(63:10)

근심하게 하였단 말을 반역했단 말과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성령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해서 성령님이 두 분이란 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누구의 이름으로 일하시는가에 대한 표현>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복음을 제자들보다도 더 잘 이해했으며 바울사도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스데반이 보았던 구약 백성들 역시 성령을 거스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약백성 역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30:6)

구약 백성들 가운데 마음의 할례(10:16, 4:4) 즉 성령의 중생케 하는 역사를 베푸심을 보여주며,

그렇게 때문에 구약 백성들이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구원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알려줍니다.

 

결론적으로 구약백성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보이는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 스데반 집사의 주장 - 7:48)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고 거듭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인용한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 - 고전3:16>는 말씀이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

 

언약 체결을 할 때마다 후렴구처럼 따라 오던 말씀입니다.

야고보 역시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똑 같이 말합니다.

*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