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칼빈신학

칼빈의 복음서 이해와 오해

오은환 2016. 5. 3. 14:5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

 

칼빈은 위 구절에서 회개하는 것과 믿음(신앙)의 순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처럼 믿음이 회개에 선행한다는 다소 딱딱하고, 본문에 넣었을 때

어색한 사상을 집어 넣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본다면 당연한 순서입니다.

믿음이 없는 회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복음서를 이해하는 큰 틀을 어떻게 세울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는 이신칭의라는 틀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열매로 판단하겠다는 말씀이 나올 때마다 힘든 결정을 했습니다. 

 

칼빈 역시 복음서 해석에 많은 애로점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첫째로, 당시의 청중들이 구속을 받았는지에 대해 뚜렷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됨)를 전파함으로 구원으로 초청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이 구속함을 받았음을 뚜렷하게 각인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사29:22)

 * 야곱아, ...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사43:1) 

 

둘째로, 당시 청중들이 성령이 내주했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회개보다 선행한다고 것이 난해하게 된 것입니다.

구속이 곧 믿음(신앙)이며,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에 회개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없는 자가 회개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없단 말은 곧 그에게 구속의 은총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가 아니라 먼저 회심을 통한 영접이 있어야 자녀가 됩니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약 이해는 사실 모두 오해에 도달합니다.

구약에서 성령이 내주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성령론에 대해 매우 협소한 관점만이 존재했습니다.

족장들에게 임한 성령의 내주와 거룩하게 하심을 따라 믿음의 생활을 했던

부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 ...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창48:16)

 *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창48:21)

 

복음은 죄인된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이 임하고, 그 결과 거룩한 백성, 거룩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구속과 성령의 내주를 보지 못하면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에 비추어 불완전한 교리나 생각, 이론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세대의 잘못된 생각이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것을 옳게 해석했으니 우리는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올바른 큰 틀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영광....

 

이것은 큰 틀입니다.

이 안에서 차곡차곡 진리를 정리하고 바로 세우는 것이 개혁입니다. 

온전한 복음만이 이 어둡고 부패해가는 세대를 올바르게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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