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주장이면서 장로교의 독특한 교리가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은혜에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견인교리가 나왔는지 성경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루이스 벌꼽의 조직신학에서 견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 견인(堅忍, perseverance)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라 하겠다(기독교 신학개론 p.291)."
견인에 대한 오해는 여러 측면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① 성령은 성도의 믿음과 상관없이 계속적으로 은혜만을 베푸는 것이 성경적인가?
② 성령은 성도가 배교하려고 할 때에도 필연적으로 막아야만 하는가?
③ 성경에는 많은 배교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처음부터 신자가 아니었는가?
④ 성령훼방죄는 견인의 교리를 벗어나는가?
더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은 은혜만을 베푸십니까?
아니면 은혜와 더불어 심판하는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계실까요?
견인교리는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적합한 교리가 됩니다.
하지만 구속을 입고 성령이 내주했지만 성령을 거역함으로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견인교리는 절반의 옳음과 더불어 나머지 한 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견인과 심판이란 두 가지 성령의 얼굴을 다 펼쳐주지 못했고
그로인해 다소 왜곡된 진리로 전락되었습니다.
견인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배교자에 대해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만
성경은 일관성있게 그렇지 않음을 증거합니다.
견인교리의 함정은 성경해석의 왜곡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길가,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해 불에 던져집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견인교리에 집착하면 이들 세 곳에 있는 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가진 믿음을 <일시적 혹은 상상적 신앙>으로 보면서 진짜 신앙은 처음부터 없다고 단정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즉 열매 맺는 자들만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성경해석의 왜곡이 심각하게 일어난 곳입니다.
견인교리가 나쁜 것은 아닌데 너무 집착하면 큰 틀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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