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신학지남 2016년 가을호에 실린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총신대학원 조직신학 이상웅 교수의 글입니다.
'새 예루살렘(계21:9-22:5)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와 설교'
이상웅 교수는 16년간 목회사역을 하면서 세 번에 걸쳐 요한계시록 연속 강해를 했습니다.
그는 <개혁파 종말론의 관점에서 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편적으로 두 가지 관점을 모두 서술합니다.
이 교수는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들을 묘사하는 상징으로 보았고,
그런 관점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두 가지 견해 모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면서 그중에서 차선을 택한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의 입장이든 장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p.33)
상징으로 해석하던 이 교수의 주장은 결국 '풍유(알레고리)로 귀결' 되고 맙니다.
풍유적 해석의 대가 오리겐을 정죄했던 그 사슬에 자신도 매이고 말았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라고 단정하고 시도한 해석이 이렇습니다.
상징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도의 어떤 면을 묘사하고 있는가에서
멀리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생명수 강이 실제적인 강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있어서
"맑고 투명하고 오염이 되거나 썩고 부패한 요소가 전혀 없다"로 해석합니다(p.27).
생명나무나 열매 역시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p.29).
수많은 상징들을 다 다루지도 못하지만 너무 무리한 해석인지
한편으로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논자는 신천신지에 강이 있고, 생명나무가 가시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p.27)
이런 주장은 또 다른 모순을 낳습니다.
신천신지(새 하늘과 새 땅)에 생명수의 강과 생명 나무가 있지 않습니다.
오직 새 예루살렘 성에만 있습니다(계22:1-2).
무천년 신학으로 요한계시록을 올바르게 설교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기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천년주의가 행하는 풍유적 해석의 비극입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실제가 아니라 풍유나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이야기라면
펄펄뛰며 거부하는 자들이 계시록에서는 풍유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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