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지남

성자의 영원한 '나심'(generatio)에 대한 죽산(박형룡)의 이해

오은환 2017. 3. 18. 17:49

이 논문은 총신대학원 최홍석 교수님이 죽산 박형룡 박사의 성자의 영원한 나심에 대한 글입니다.

(신학지남, 2008년 여름호)

 

죽산(박형룡 박사의 호)이란 호칭을 사용하여 저자의 글을 소개하고 평가합니다.

죽산은 여느 개혁주의자들처럼 '나심'(generatio)과 '나오심'(processio/spiratio)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심의 이해하기 위해 큰 틀을 잡습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이 사람들과 관련된 '외향적 사역'이 아닌, 삼위일체 가운데 일어나는

'내향적 사역'으로 프레임을 형성합니다.  

 

"... 하나님의 판연(구별되게 서로 다름)한 내향적 사역은 그 위(位)들 상호간에 내재한 일 즉 발생과 위자(아들됨)와

발출 혹 출송이다. 하나님의 외향적 사역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관계를 맺는 일들이니 두 가지로 다시 나누인다.

 그 첫째는 외면적으로 실현되기까지는 하나님 안에 내재하는 작정의 일이요, 그 둘째는 창조, 섭리, 구속이다"(p.128)

 

하나님의 독특한 내향적 사역을 정리하면,

"성부는 소극적으로 발생 또는 파송되지 않으시며, 적극적으로는 성자의 발생과 성령의 파송이다.

성령의 파송은 성자의 사역도 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성부의 독특한 내향적 사역은

능동적으로 성자를 영원히 발생하심이다'(p.129)

 

(이 부분은 성령의 파송을 아버지의 사역으로 보는 동방교회의 견해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사역으로 보는 서방교회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죽산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헤르만 바빙크의 "역사적 분석적 방법"을 따르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신학자 루이스 벌꼽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성자의 영원발생은 성부가 의지의 선택에 의하지 않고, 성질의 필연에 의하여 성자의 위를 발생하시되, 그에게

신격의 전 실체를 전달하시어 성자로 하여금 성부의 정확한 형상으로 영원히 계속하게 하시는 성부의 영원한

위적 행위다"(p.135)

 

최홍석 교수는 이런 죽산의 견해를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① 하나님의 필연적인 행위이다

성자의 발생을 최초로 말한이 중의 한 사람인 오리겐은 성부의 의지에 의지하는 자유로운 행위로 보았고,

다른 이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와 기타 사람들은 성부의 선택적 의지에 의지하는 발생은 성자의 존재를 우연적인 되게

할 것, 그리하여 성자는  존재하지 않으신 때가 있었을 수 없는 필연적 존재자 성부와 동등동체(호모우시오스)

되지 못하시어, 신성을 박탈당하게 되실 것을 보았다. 그러나 성부의 병발적 의지가 이 발생을 완전히

기뻐한다는 의미에서는 이 일이 성부의 의지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p.138).  

 

② 하나님의 영원한 행위이다

 이 부분의 설명은 매우 어렵습니다. 죽산은 성부로부터 성자의 나심을 시공(時空)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일을 유비로 하여 설명될 수 없다고 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원성에 근거하여 시공이 아닌 영원속에서 행위로

나심을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신적 시간>을

적용해서만 '나심'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부로부터의 성자의 나심은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일일 수밖에 없다"(p.141)

 "그 일은 비시간적 행위, 영원적 현재의 행위, 항상 계속하되 오히려 완성된 행위라는 것을 의미한다"(p.144)

 "굳이 이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시도한다면, 성자의 나심이란 신적 성질의 영원한 현재에 속한 일로서,

 항상 지속되는 일이지만 완성된 일이며, 완성된 일이지만 항상 지속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p.145)

 

③ 위적 실존의 나심이다

성자의 나심은 성자의 신적 본질의 나심이 아니라 그 위적 실존의 나심을 뜻한다.

죽산은 '성자의 나심', 그것으로 인해 신적 존재에 나타나게 될 결과에 대해 발생은 신적 실유에 구별과 구분을

가져오나 변이와 분할은 가져오지 않는다.

 

④ 유래와 동등의 의미를 지닌다

죽산 박형룡은 '성자의 나심'의 이해에 대해 몇 번이나 당부합니다.

성자의 영원한 나심의 교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영적, 신비적 방식의 접근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자의 나심을 생리적 생물적 방식에 의해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모순은 없을 것이며,

 이 사실을 영적 신적인 방식에 의해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신비가 또한 없을 것이다"(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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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을 따라 잘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버겁게 느껴집니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하며, 인간의 영역에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이 문제를 하나님의 영되심의 영역으로 또 하나님의 속성의 영역으로 놓아야만 가능하다는 견해는

타당성 있게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이교 세력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창조 때 타락전 아담의 인식정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만들지 않고, 아담을 통해 하와가 나오게 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가 나오심 역시 성부와 성자의 나오심을 잘 보여주는 모델이 아닐까요?

 

죽산 박형룡 박사는 잘 설명했지만 이해시키기 어렵게 하늘 위의 언어로 전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