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지남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processio/spiratio)에 대한 죽산(박형룡)의 이해

오은환 2017. 3. 19. 22:49

이 논문은 총신대학원 최홍석 교수님이 죽산 박형룡 박사의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에 대한 글입니다.

(신학지남, 2009년 봄호)

이 글은 신학지남, 2008년 여름호에 이어서 기재된 글이므로 '성자의 영원한 나심'의 패턴을 따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많은 설명들이 생략됩니다.

 

성령의 잘못된 이해는 교회에 치명적인 독을 뿌리는 것과 같기에 죽산 박형룡 박사는 교회사적 사건들로

시작합니다.

"사모사타 사람 바울의 '세력적 단일신론'은 성령을 단순히 신격의 비인격적 속성뿐으로 보았다. 

 소시너스파는 성령을 정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에게 흘러내리는 덕이나 세력'이라 하였다. 

 슐라이어막허는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단체 전부에 투철하게 하는 정신이라 하였다"(p.11)

 

위 구절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합니다.

"사모사타의 바울을 비롯하여 역동적 단일신론자들은 대개 양자론적 이단사상을 주장하였는데, 죽산의

지적과 같이 그들이 성령을 '신격의 비인격적 속성'으로 본 것은 그들이 가진 잘못된 기독관과 연루되어 나올

수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유대교의 일신론적인 종교적 요인과 다른 한편, 제 일 원인(prima causa)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헬라 철학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홀로 성부만이라는 배타적 사고에 이끌려 제 2 위와 제 3위와의

관계를 규정하다보니, 예수는 원래 단순한 인간이었지만, 세례 받은 후 신의 아들로 승격되었다고 하는

기독관을 가졌으며, 또한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앞서 진술했던 바와 같은 성령이해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p,12)

 

성령에 대한 그 인격성과 신성이 함께 인정되고 수납되어야만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죽산의 확신을 확인합니다.  

 

성령의 나오심

"이 교리는 성자의 나심 교리가 난해한 것처럼, 역시 동일한 신비에 싸여있다. 

성령의 발출은 다른 말로 출송(spiration)이다. 

출송은 삼위의 제 일 위와 제 이위가 신적 실유 안에서 제 삼위의 위적 실존의 근거로 되어, 

제 삼위로 하여금 분할, 격리, 변화 없는 신적 본체 전부를 소유케 하는 그들의 영원적 필연적 행위이다"(p.14,15)

 

성령의 발출에 관하여 죽산은 서방 교회의 견해를 추종합니다.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필리오꾸에) 나오심을 철저히 따릅니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체를 소유하신다는 표현 자체가 필리오꾸베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동방교회의

신학적 근거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한 셈입니다. 

 

성자의 영원발생을 성령의 영원발출에 적용합니다. 

성부와 성자의 자의적인 뜻이 아닌 필연적인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성자의 발생에 관하여 말한 것 많은 부분이 성령의 발출에도 적용되나, 

 두 가지 사이에 몇 가지 중요한 구별이 있다. 

 (1) 근원 - 발생은 성부만을 근원으로 하고, 출송은 성부와성자 두 위를 근원으로 한다. 

 (2) 양식 - 발생에 의하여 성자는 출송에  참여할 권세를 얻으시나, 성령은 이 같은 것을 얻지 못하신다. 

 (3) 순서 - 성자와 성령이 다 같이 영원하나 우리의 사유의 양식에서와 논리적 순서에서 발생은 출송보다

      앞선다"(p.20)

 

죽산은 말하기 꺼려하는 부분도 기록합니다. 

"마지막으로 순서와 관련된 구별로서는 성자와 성령 두 격위께서는 모두 영원하시지만, 

 성자의 영원한 나심은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성자의 나심과 성령의 나오심

사이에 구별되는 국면들이다"(p.21)   

 

사실 죽산은 삼위 하나님을 논하면서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보다 먼저 있었다(앞선다)는 말을 매우 조심스러워

합니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물학적 관점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영역(언어)에서 보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의 사이에서는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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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박형룡 박사의 견해는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일치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보지 못한 면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1. 성령의 나오심

성령의 나오심은 성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합니다.

이 부분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아들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아버지의 고유 권한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재림의 순간을 결정하는 분이 성부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되신 자신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아들이 전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가장 적절한 시간에 아들을 위하여

그 권한을 쓰실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성령의 이름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한정합니다.

오순절 때 임한 <아들의 성령>은 구약의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그 소유와 권세를 위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성령을 보내는 시점과 아들이 성령을 보내는 시점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2. 동일본체이기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송?

이런 논리는 다른 이론들을 뒤죽박죽하게 만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에 성령이 두 분에게서 나와야만 한다면

다른 모든 것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지만 서로가 하는 일이 다르기도 합니다.

두 분이 항상 같은 일을 같이 추진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십자가를 지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성부께서 그것을 알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지는 않았습니다.

 

성령의 출송은 성경에 매우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구약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성령입니다.

즉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으로 보낸 것입니다.

아직 구속사역을 완수하지 않았기에 그 권세를 아들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약백성들에게 전하고 조명했습니다. 

 

신약은 그 권세가 위임되어 아들의 성령으로 일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구하여 받아서 보내신 성령입니다.

보내심의 시간이 다릅니다.

성령은 자신을 보내신 아들의 뜻을 신약성도들에게 전하고 조명했습니다.

 

3. 언어를 나누면서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는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영역의 언어와 영원한 하나님의 영역의 언어로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이러한 행위는 위험을 최소화하려다가 더 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로운 행위(성자의 나심과 성령의 나오심)가 아니라 필연적인 행위라는 설명이 그렇습니다. 

자유로운 행위라면 성자의 권세를 취소할 수 있다거나 성령 또한 그럴 수 있다 한다면 문제가 큽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하심이 깨어지며, 약속에 대한 불변성이 어찌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려는 실수가 됩니다. 

계시를 주신 것은 사람의 언어로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이해했던 계시가 구약 선지자들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