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교회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연구, 신학지남, 2008년 가을호, 김길성 저>로서, 원래 하나의
글이지만 편의상 교회의 기원/교회의 본질이라는 두 개의 제목으로 나누어 기재합니다.
1. 교회의 기원
교회의 기원과 교회의 본질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게 있습니다.
저자는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 제25장을 이용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말합니다.
"1. 무형한 공동 즉 보편의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는 피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는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아내요,
몸이며 충만이다.
2. 유형 교회도 복음 아래서는 역시 공동 즉 보편의 교회이니, <전에 율법 아래서처럼 한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 구약교회>, 전 세계를 통하여 참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집과 가족이니, 이것밖에는 구원의 통상한 가능성이
없다"(p.33)
저자는 신앙고백서가 유형교회의 틀을 <율법 아래의 교회 - 구약교회>와 <복음 아래의 교회 - 신약교회>로
구분하고, 구성원적인 구별이 있으나(구약은 유대인들로 한정), 유형교회는 하나인 것을 말합니다.
(아쉽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약을 율법이라 규정하며, 그곳에서 복음을 제하여 버립니다.
율법은 복음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기에 복음의 반영인데, 굳이 신약만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2. 교회 기원에 대한 연구
교회의 기원을 타락한 이후로 보는 개혁주의자들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 보는 세대주의자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자는 개혁주의자들처럼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시대에 교회가 없었고,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후 성령강림과
더불어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이러한
특징은 구약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라고 말합니다.
침례교회 목사요, 미국 벧엘 신학교 교수인 '세대주의자 밀라드 에릭슨' 역시 동일한 이론을 추종합니다.
교회의 기원을 세 가지 이유를 통하여 오순절 이후로 봅니다(p.35).
① 마16:18절을 인용하여,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에 사용된 동사가
<미래시제>로 사용되었다.
② 마태복음 외에 다른 세 복음서에 교회라는 낱말이 없으며, 동일저자인 누가가 사도행전에는 24회나 교회를
언급하지만, 누가 복음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③ 행7:38절의 광야교회(구약교회) 번역은 문제가 있다. 이 본문의 헬라어 용어가 비전문적인 의미, 곧 광야 회중
또는 광야 총회로 사용되었다.
3. 문제의 검토
세대주의자 에릭슨의 세 가지 의문에 관하여 저자는 반박합니다.
① 마16:18절이 비록 미래시제를 사용하더라도 교회라는 낱말이 과거에도 없었고, 또한 당시 말씀하시는 예수님
외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낱말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18:17절에 두 번 언급된 교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저자의 접근이 매우 아쉽습니다. 마16:18절의 <내 - 예수> 교회는 분명 미래시제입니다.
신약시대에 세워지는 교회의 이름은 예수님에게 위임된 권세에 따라 "예수교회"로 불러집니다.
그러면 구약교회는 어떻게 불러졌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고전1:2, 10:32, 11:22, 15:9, 고후1:1, 갈1:13, 살전2:14, 딤전3:5,15)
구속사역을 완수한 예수님에게 모든 권세가 위임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용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나라, 예수의 성령 등이 그렇습니다.
모두 구약에서 성부 하나님에게 돌려진 영광의 용어들입니다.
그러므로 마16:18절에서 미래시제가 사용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교회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② 행7:38절의 광야 교회가 실질적인 교회가 아니라 회중 혹은 총회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저자는 자세하게 반박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총 23회에 걸쳐 에클레시아(교회)가 사용됩니다. 그 중에서 3회(행19:32,39,41)는 교회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경입니다.
히브리어 카할을 번역한 것으로 칠십인경에 약 69회 등장합니다. 또한 카할이라는 이 낱말은 칠십인경에서
37회에 걸쳐 쉬나고게(회당)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쉬나고게는 주로 히브리어 '에다'의 번역어로 사용되는데, 지정된 때와 장소에 함께 모이는 것을
의미하는 여후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에클레시아라는 낱말은 분명히 구약성경의 카할과 에다라고 하는 두 낱말의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세대주의자 에릭슨이 주장하는 광야교회가 교회의 의미가 아니라는 견해는 본문에서도 충돌합니다.
스데반의 증거는 광야교회인 구약교회와 신약교회가 연속성을 지녔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에릭슨은
반대로 연속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4. 저자의 결론(p.47)
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부터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이요,
(이 부분도 아쉽습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라면 타락전 아담과 하와 역시 성령이 함께 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옳은 견해가 될 것입니다)
② 구약시대에도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요,
③ 구약시대의 교회와 신약교회 사이에 구속역사적인 구분이 있다는 것이요,
④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의 시초가 아니라, 신약교회의 출발이라고 하는 점이요,
⑤ 계시의 진전에 따라 구약시대의 교회보다도 신약교회의 영광이 훨씬 더 크다고 하는 점이다
(괄호) 안의 빨강색 글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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