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다섯달 꼬박 걸어갔던 먼 나라 바벨론 생활은 두고 온 예루살렘과 성전을 그립게 했습니다.
포로된 삶의 고달픈 현실은 노동과 착취 그리고 자유가 없는 삶에서 나타났고,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식마저 바꾸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부를 수 없던 것입니다.
권세자들이 조롱하듯 부르라고 하는 노래는 포로들을 더 슬프게 했습니다.
"시온의 노래중 하나를 노래하라"(시137:3)는 요구에 입술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시편 137편의 마지막 세 구절은 원수들을 향한 저주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을 헐어버리라 외치는 에돔 족속과 실제로 파괴했던 바벨론에 대한 저주입니다.
그 중 바벨론에 대한 구체적인 저주는 원수를 사랑하는 예수님의 메시지와는 너무도 다릅니다.
※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137:8,9)
왜 이런 저주가 시편에 실려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노래하게 했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아직 미약한 바벨론이 강대한 나라가 되며, 또 그들의 멸망당함을 예언합니다.
※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사13:1)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목전에서 메어침을 당하겠고, 그들의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들의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사13:16)
시편 137편은 포로된 이스라엘이 당한 수치를 은밀한 곳에서 말씀을 기억하며 불렀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깨달았던 그 예언을 바벨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죽이며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포로된 자들에게 이 노래는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이 부분을 종말론적 관점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좁게 개인적인 종말이나 크게 세상 나라들의 종말이든 문제가 없습니다.
의인을 핍박하는 강력한 자들이나 세력들이라도 <딸 - 연약함의 대명사> 바벨론처럼 약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의인 핍박은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끝을 맺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강대한 제국 바벨론,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몰락될 것을 드러냅니다.
*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계14:8)
바벨론에게 회개를 기회를 주었지만 모두 외면했던 대가를 받는 시점은 심판의 때입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범죄함으로 그들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계18:5)
*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리라(계18:6)
교만이 하늘을 찌를 때 자신을 여왕으로 여기며, 결코 과부처럼 애통하게 될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계18:7).
그런 바벨론의 통치자들이 눈 앞에서, 사랑스런 자녀들이 투박한 바위에 메어침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 예언의 노래를 부름으로 먼저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고, 하나님이 개입하여 예언을 성취하는
소망의 날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노래는 주의 재림을 앞두고 벌어질 상황과 유사합니다.
모든 성도의 권세가 깨져버린 상황에서(단12:7)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인내하면서
부를 노래입니다.(계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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