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지남

자살하면 지옥에 가는가?

오은환 2017. 6. 1. 20:32

<교회 안 자살자에 대한 개혁 신학적 관점 - 신학지남, 2017년 봄호, 이상원 교수>

이 논문은 신학지남에 실린 글로서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상원 교수의 글입니다.

 

* 들어가는 말

1. 자살이란 무엇인가?

2. 성경적 관점에서 본 자살

3. 교회사적 관점에서 본 자살

4. 개혁주의 구원론의 관점에서 본 자살

* 나가는 말

 

자살이란 무엇인가? 먼저 정의를 내리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죽음의 위협이 찾아 왔을 때

그 위험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협에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논문이 추구하는 성도의 자살이란 관점에서 성도의 범주도 정의해야 한다.

 

"성도란 삼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회의 회중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통하여 은혜도 받고 신앙도 성장하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통하여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참된 신자로 여김을 받아 온 성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신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듭나지 않은 거짓 신자는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한다"(p.10-11).

 

이 논문은 저자의 세 가지 관점을 드러낸다(p.11).

물론 저저의 관점은 개혁주의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1. 성도의 자살을 성도의 사후 진로 - 천국행인가, 지옥행인가 - 를 결정하는 근거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

2. 성도들은 자살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규범적 명령 아래 있으며, 이 행위는 성도의 사후의

  진로를 결정하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급 또는 책망을 위한 근거>가 된다. 

 

3. 교회가 "자살여부가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원리를 공적인 설교나 가르침의 자리에서

  공언(公言)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자살한 가족들에게 개인적인 목회상담을 할 때 활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성경에서 자살한 사람들로 삼손, 사울, 아히도벨, 시므리, 가룟유다의 예를 든다.

(하지만 삼손과 사울 왕은 자살로 볼 수 없다)

 

저자는 성경에 확실하게 사후가 어떻게 되었다고 말을 하지 않는다로 결론짓는다.

교회사적 관점에서 자살을 어떻게 보았는가?

초대교회는 자살자를 살인자로 정죄했다. 특히 어거스틴은 자기 목숨을 손대라는 명령이 없기에

적의 손에 잡히지 않기 위하여서나 순결을 지키기 위한 자살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중세교회는 자살자들은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자살자는 지옥의 어두운 곳에 들어가 칩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속설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살자의 매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867년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로 선언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 가지 관점에서 자살을 죄로 정리했다. 

자살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연적인 성향에 대항하는 범죄이며, 인간은 공동체의 소유물인데, 마음대로

손대는 행동은 공동체에 대항하는 범죄이며,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죄로 여겼다. 

 

종교개혁시대는 자살을 비윤리적 행위로 비판했으나 자살과 구원문제를 연결시키지 않았다. 

루터나 칼빈 그리고 청교도들은 자살하게 만드는 악마의 힘이 작용함으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주장은

반대했다. 또한 자살자가 죽기 전에 회개할 수 있기에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견해도 보인다.

중세시대를 풍미했던 자살관(성령훼방죄)에 찬성하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는 대체로 자살과 구원의 문제는 서로 연관될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이다.

존 프레임은 자살한 참 신자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개혁주의 구원관은 어떤 것이기에 자살과 구원은 무관하다고 하는가?

신학적인 측면에서 살펴 보자.

 

개혁주의 구원관은 아홉가지 구원의 서정이 있다.

그 중에서 재림 시에 신자의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하는 근거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단계들은

중생, 칭의, 양자됨이며, 견인이 이 단계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중생한 자들도 생활 속에서 반복하여 죄에 빠질 수가 있으나 그래도 중생이 취소되는 일은 없다.

중생한 자는 일시적으로 죄에 빠졌더라도 다시 돌아온다.

 

신자는 일시적으로 범죄 할 수 있고, 일시적으로 배교할 수 있으나, 그가 참으로 중생되고 구원받았다면

아주 타락하지는 않는다.

성령 훼방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서 영원히 사함받지 못한다.

저자는 성령훼방죄가 성령을 받은 자가 의도적으로 복음을 거부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 반대로

생각하여 성령이 개인에게 역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회심과 성화는 재림 시에 천국행이 <이미 결정된> 신자들이 종말의 날까지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자

할 때, 통상적인 신자라면 반드시 수방되어야 할 규범적인 단계들이지만, 천국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행한 자살이라는 <도덕적인 죄악>은 중생, 칭의, 견인을 주도하시는 성령의 구원사역을

취소시키지 못한다.

칭의 시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책이 단번에, 완전히, 영구히 제거된다.

거듭남 이후에 신자가 범한 죄들 가운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일관된

주장이다.

 

............. 평가 .................

 

자살이란 문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성화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교리는 복음서나 구약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가?

과연 만족할 만한 답을 주고 있는지 개혁주의 신학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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