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세례의 신학적 정당성(신학지남 2004년 봄호, 최홍석 교수)
Ⅰ. 들어가는 글
개혁신학에 이르러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강조하는 언약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비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르는 자들은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
우리 장로교 안의 일부 신자들이나 목회자들 사이에도 유아세례의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 때로 부족하거나 흔들리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유아세례는 교회 안에서 필히 시행되어야 할 성례이다.
Ⅱ. 교부들의 증언
1. 이레니우스(130-200)
여러 계층의 구원의 대상들에 관해 말하면서 특별히 유아들이 구원의 대상임을 강조하여 진술한다.
"예수는 그 자신을 통하여 만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내가 말하는 모든 사람이란 그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다... 유아들을 위하여
유아가 되셔서, 유아들을 거룩하게 하셨다.
2. 히폴리투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라"
명령어로 표현된 명시적 언급 자체가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당시 유아세례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오리겐(185-254)
오리겐은 유아세례의 전통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교회의 관행을 따라 세례는 유아들에게도 주어진다"
이와 같이 유아세례의 관행은 그 기원이 사도적 전통 속에 있음을 오리겐은 밝힌다.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유아들에게도 세례를 베투는 전통을 받았다"
이와 같이 교회의 관행이며, 사도적인 전통에 기원을 두고 있는 유아세례는 인간 속에 내재하는
원죄 때문에 마땅히 필요한 것임을 그는 역설한 것이다.
4. 키프리아누스
유아세례는 할례처럼 팔 일 만에 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자보다는 언약의 자녀로서 유아세례를 받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표명을 하였다.
카르타고의 감독으로서 그는 <본질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공의회의 입장>을 변호하는 교회
옹호론적 태도로 자신의 관점을 밝혔다.
막 출생한 유아에게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는데, 그 점은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함의하는 것으로 해석될 충분한 여지가 있다.
5. 나찌안스의 그레고리
유아를 어렸을때부터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유아세례에 참여토록 했다.
6. 존 크르소스톰
소극적으로 죄 용서만을 위해 유아의 세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더 많은 영적 유익들을 위해 유아들에게도 세례의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7. 어거스틴(354-430)
세례란 성례는 가장 확실한 거듭남의 성례이다.
세례를 통하여 세례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된다는 사상, 그리스도께서는 비밀한
은총을 그의 신자들에게 부어주시되 유아들에게까지도 부어주신다는 사상,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사상>, 그 일에 유아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라는 점,
세례란 성례는 가장 확실한 <거듭남의 성례>임을 강조한 점 등은 다른 교부들에게서와는 달리
유독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Ⅲ. 유아세례의 교회론적 배경
1. 교회의 경계선
세례는 기독교회의 의식이다. 세례를 통하여 세례 받은 자들은 가시적 교회의 한 일원들로
받아들여진다. 세례와 관련된 문제는 교회론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예수를 주, 곧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로만 구성된다고
해야 한다.
오직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통해서만 또한 믿음을 통해서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데,
이 거듭남과 신앙이란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영적인 사실이며 따라서 신령한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이처럼 교회를 가리켜 거듭난,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 정의할 때,
중생과 신앙은 결코 육안으로는 파악될 수 없지만 예배에서 신앙고백을 하며, 찬송을 부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마음 속에 보이지 않던 신앙이 드러나게 된다.
2. 두 경륜의 연속성과 통일성
세대주의 사상은 신구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배제함으로 비성경적이다.
교회는 구약의 경륜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원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하셨으나 유대인들의 거부로 예기치 못한 교회가 생겨 그것은 잠정적 성격을 지닌 것이란 견해는
성경적으로 전혀 타당치 못하다.
신약의 교회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연장과 확대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된 그것은 구약의 경륜 속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로 그 복이다.
이처럼 언약을 근거하여 구약의 경륜과 신약의 경륜이 상합하고, 구약의 교회는
신약의 교회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Ⅳ. 언약의 표 : 할례와 세례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 사이에 행해졌던 각각의 성례들을 살피고 통일성을 살펴야 한다.
구약교회의 성례는 할례요 신약교회의 성례는 세례이다.
두 형태의 성례가 지닌 외적인 구별과 내적인 연속성을 살펴보자.
구약의 경륜 아래서 이미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유형적인 모습들, 곧 그 조직과 제도, 그것의 운영체제 가운데는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구약의 교회 안에 속한 자들은 그들에게 속한 어린이들과 유아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할례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풍성한 신령한 복의 인호이며 확증이다.
할례가 심오한 의미를 가지는 것도 그것이 바로 이 언약의 증표가 된다는 점에서이다(창17:1-5).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의 연합과 교제이다.
(쉽게 말해서 복음에 참여함)
팔머 로벗트슨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다루면서 언약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연합임을 여러
곳에서 언급한다.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언약 공동체 속에 포함됨을 상징했다.
할례는 근본적으로 언약의 복에 참여할 목적으로 <부정과 불결로부터 옮겨지는 것을 의미> 한다.
할례는 더러움을 제거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레19:23, 26:41, 신10:16, 30:6, 렘4:4, 6:10, 9:25).
이처럼 부정함과 불결함의 제거하는 상징하는 할례는 여호와와의 연합과 교제를 가능케 하는
언약의 내용에 상응하는 적절한 표지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성결함의 표지이기도 하다.
할례의 세 가지 의미는 첫째,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 두 번째, 부정함과 불결함의 제거,
마지막은 믿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의의 증표이다. 할례의 세 가지 의미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결속되어 있어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는 인생 가운데 <부정함과 불결함을 두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는 비록 외형상 그 시행 방법이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본질상 둘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성례>이다.
세례는 죄인의 내면적 속성인 부정과 불결로부터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정결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Ⅴ. 개혁 신학적 관점의 논증
유아들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으며 또한 구원을 받는다(시139:13, 렘1:5, 눅1:15, 막10:13-16).
개혁신학의 주된 관점은 유아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의 지식 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유아세례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은총은 서로 연결된다.
물론 여기서의 유아의 신앙은 신앙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경우로 제한한다.
물세례는 다만 참된 내적인 세례의 표일 뿐이다. 참된 내적인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와 자범죄를 씻어버리는 것이다(롬6:3, 골2:12, 딛3:5).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우리의 죄를 씻어버리는 진정한 세례를 받는다.
세례 받는 자녀들이 모두 구원받으리라는 부모의 어떤 소망이 유아들로 하여금 세례 받게
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유아세례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그분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을 믿게 만드는 그분의 약속에 기초한 것이다(창17:7, 행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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