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의 말씀에 대한 엄격한 준수(22:6-21)
★ 22장 6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깨어날 자들도 있지만,
에서처럼 소홀이 여길 자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언의 말씀에 대한 현재적 반응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 성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 할 것인지, 아니면 성 밖에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것인지를 결정한다(단 12:2)
1. 누가 복 있는 자인가?(6-10)
1) 복 있는 자는 말씀을 지키는 자
선지자들의 예언은 ‘반드시’, 그리고 ‘속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긴박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계시록을 시작하면서는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한다(계 1:3).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는 다 하나이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듣거나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킴으로 복이 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하나님 나라로 초청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감은 말씀을 지킴으로 이루어진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2) 예언된 말씀의 긴급성(6-7) - 반드시, 속히
‘속히 오신다’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유한한 인간에게 ‘속히’라는 말은 측정하기 어려운
단어이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주의 날’이 속히 올 것이라 말했다. 선지자들은 주의 날을 초림과
재림의 간격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사용했다.
메시아의 오심과 오순절 사건 그리고 재림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고 있다(욜 2:28-32)
베드로는 요엘 2:28-32절의 사건을 오순절에 성취되었다고 했다(행 2:16-21).
베드로 또한 초림과 재림의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들은 예언된 말씀의 시간적 간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들을 중점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속히 오신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인 비예기성 즉 예기치 못한 때 도둑같이 오심을 말한다.
복음을 듣거나 지나친 사람들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점은 주인 되신 예수님이 더디 올 것이라 예측하고 준비하지 않는 것이다
(마 24:48). 그래서 충성스런 일꾼이 되지 않고 방탕한 술친구들과 먹고 마심으로 시간과 사명을
허비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속히’라는 개념은 생각하지 않는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오심을
의미한다(마 24:48-51).
재림의 정황을 이해하고 정리하면 성도는 재림 전 적그리스도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다.
성도의 애타는 부르짖음 속에서 재림에 대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지며, 성도를 구원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에 ‘속히’ 오신다.
-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40:13)
-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시 141:1)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결코 식언치 않으신다.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계시록의 처음과 마지막은 이 예언의 말씀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이루어진다고 반복하며
마무리한다.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계 1:1)
-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 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계 22:6)
2. 말씀 앞에서 두 갈래 길(10-15)
천사는 요한에게, 두루마리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한다.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이다(10).
반대로 계시록 10:4절에는, 민감한 말씀을 기록하지 말라 했다. 중요한 말씀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강조해서 전달하려는 목적이다. 지혜 있는 자는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다(계 10:7).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그 의미를 이해하는 힘을 주고, 게으르고 무관심한 자들과 말씀을 악의로
왜곡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보화가 숨겨질 것이다.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들(14)
성도는,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받는다. 그것은 재림 때,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이다(사 35:8,9). 상급은 행함에 대한 대가이다(12). 이러한 상급은 자신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경험하고 갈망하는 성도들은 그것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한다.
성도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의 행위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성령님을 통하여 내 안에서 이루어져, 열매들로 나타난다.
성도들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성령 안에서 인치심을 받았다(엡 4:30).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떠나서는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성령은 성도들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
위의 말씀은 후렴처럼 일곱 교회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왜 일곱 번이나 매 교회마다 이렇게 간절히
말하는 것일까? 교회가 교회로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다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진리를 벗어난다. 성도는, 광명한 천사로 위장한 사탄의
소리를 분별하며, 오직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생명을 얻고 풍성한 꼴을 얻는다(요 10:10).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며, 거룩한 성에 기쁨으로
들어간다.
2) 성 밖에 버림 받은 자들(15)
성 밖에 버림을 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뒤따라 나온다.
성경은 성 밖에 버림받은 자들이 있음을 누차 강조한다(계14:20, 20:9, 21:27, 22:15; 고전 6:9;
엡 5:5).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마 22:13)
바깥 어두운데 던져진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계21:8, 27절과 22:15절을 분석해보면 이들은 적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버린 자들이다.
적그리스도의 강력한 무력 앞에서, 신앙을 포기한 자들이다(21:8).
이들은 모두 새 예루살렘 성 밖에 있고(15), 거기서 사탄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대적할 때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다(계 14:20, 20:9)
3. 새 예루살렘 성으로 초대(16-17)
예수님은 혼인잔치의 주인이다. 그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며 광명한 새벽별이다(16).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다윗을 존재케 했던 근본이시다(마 22:42-45).
다윗의 자손은 바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란 의미이다(마 22:42).
어두운 가운데서 메시아의 오심을 대망했던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은 소망의 빛이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별을 약속한다(계 2:26-28).
혼인잔치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이기는 자 곧 교회를 향하여 초대를 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성의 예비 된 잔치에 참석하도록 성령을 교회에 보내어 이 예언의 말씀들을 주셨다(16).
실로 교회가 받은 권세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교회는 때로 부패하거나 곁길로 갈 때가 있지만 예수님이 사랑하는 유일한 지체이다.
예수님은 종종 책망하고 채찍을 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모두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다
(고후 13:10).
예수님의 초청 후 성령과 신부 역시 영적싸움을 하고 있는 성도들을 초대하고 있다(17).
세 번에 걸쳐서 간절히 ‘오라’는 초청을 한다(17).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온 천하 왕들과 악인들에 의해 처절하게 찢긴 성도들을 위로한다.
환란 가운데 있지만 소망의 능력을 공급한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를 마시라 한다(계 22:17).
여기서 신부는 누구인가? 이미 선한 싸움을 마치고 새 예루살렘 성에서 안식하고 있는 천상의
성도들이다. 이들은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다(히 12:23, 계 6:9).
4. 엄중한 경고(18-19)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하며 계시된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안타깝게도 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진리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요한의 신학과 비평들이 계시록 해석의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이것들이 기준이 되어 계시록의 기록된 말씀들이 더해지거나 영감의 범위를 제한하는 영적 무지의
시대가 되었다. 영적인 무지는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 하는 자가 되어
엄중한 대가를 받게 된다.
-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 30:6)
우리는 알고 있는 부분까지 해석하고 모르는 부분은 남겨두면 된다. 누가 이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가감 없이 전해야 한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무의식적인 과오나 해석에 있어서 결함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대한 의도적인 곡해나
악용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자의 책임이 크다(18,19).
가르치는 자는 그 말씀대로 믿으며, 그 말씀대로 행하며 가르칠 때 그 상급이 크다(마 5:19).
5.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의 자세(20-21)
사도들처럼 우리도 항상 깨어 있으면서 예수님이 오시기를 고대해야 한다.
이렇게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며 예언의 말씀은 끝을 맺는다.
사도들은 문제 많은 초대교회를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세웠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다. 연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권위를 깨뜨리며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들을 엄중히 경고했다.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고 명령했다(딤전 6:14).
말씀 앞에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를 모두 세우고 순종하게 만들었다.
사도들은 속히 오실 예수님 앞에 자신과 성도들을 세우는 일을 힘썼고,
그 날에 사도들의 자랑은 바로 변화된 성도들이라는 것을 무척 강조했다.
-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약 5:9)
-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후 1:14)
나가는 말
성도가 성경을 읽고 자유의 삶을 누리기 위해 계시록은 장애물이 아니라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
계시록은 단순히 주님이 오실 때 탈락되지 않기 위해 붙잡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록을 통해서
흔들리는 삶이 붙잡힘을 받아야 한다.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은, 현재적 성도의 삶을 늘 거룩하게 한다.
예수님이 삶의 주인 되심은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해 준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가 소망 가운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그 날까지
계속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계시록을 공부함으로 성도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또한 역동성을 부여한다.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현재 그분 앞에 서서 그 음성을 들으며, 그 숨결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귀한 것인가?
창조로 시작된 성경이 재림으로 어떻게 완성되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계시록은 성경의 결론이 되며 이것을 알게 됨으로 신구약의 다른 성경들을 정확하고 풍성하게
볼 수 있는 지침서가 된다.
성경은 우리를 속박하려고 주신 책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껏 계시록을 읽으며, 영광의 소망을
갈망해야 한다.
성도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마음과
행실로 나아가야 한다.
각 지역교회들로부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즉 역사적 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을 넘어서 사도들처럼 지혜롭게 다시 오실 주님 앞에 우리 모두를 세워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
주되심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에게 환난은 곧 외적인 징표가 된다.
분명한 소망이 없으면, 아무도 날마다 죽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전 15:31).
복음의 힘찬 소망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로하며 영광의 예수님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다 같이 승리의 찬송을 부르길 간절히 소망한다(계 15:2-4).
끝으로 우리 성도들은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의 증인으로서 십자가, 부활, 재림을 온전히 이해하고, 능력 있게 증거 하는 충성된 종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계시록을 제대로 배우는 이유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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