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칼빈신학

기독교강요 : 역사, 저작 목적, 사상적 배경

오은환 2018. 2. 2. 20:32

칼빈(1509-1564)의 기독교 강요의 저술 목적 및 배경과 사상에 관하여 <신복윤 박사>의 글입니다. 

번역자로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잘 설명해 줍니다.

 

1. 역사

기독교 강요 초판은 라틴어로 1536년 4월에 스위스 바젤에서 출판 되었습니다.

모두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첫 4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전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루터의 요리문답서의 순서를 따라 배정된 것입니다.

 

1539년 두 번째 개정판이 나왔는데 6장에서 17장으로 늘어났습니다.

초판에 비하여 제본이나 인쇄가 깔끔했으며, 문체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재세례파를 논박하기 위해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다루는 장을 새롭게 삽입했습니다.

 

2년이 지난 1541년에는 칼빈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프랑스어로서 수준 높은 문체를 구사했으며, 대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작업했습니다.

3판은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났습니다.

 

기독교 강요의 결정판이 1559년에 라틴어판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칼빈의 몸이 몹시 안 좋아서 죽음을 앞둔 것처럼 열의를 가지고 마무리하려 했습니다.

21장에서 80장으로 늘어났으며, <사도신경을 따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의 4부로 재구성했습니다.

총 4권, 80장, 1,276개의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후 기독교 강요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 이탈리아어(1557년)

* 화란어(1561년)

* 영어(1561년)

* 독일어(1572년)

* 스페인어(1597년)

* 체코어(1572년)

* 일본어(1929년)

* 중국어(1955-57년)

* 한국어(1964년, 한철하, 신복윤 공역, 제 1 권)

 

2. 저술 목적

두 가지 큰 목적을 가지고 저술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단순하면서도 조직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쉽게 이해시키려는

것입니다. 또한 박해 받고 있는 형제들을 변론하기 위함입니다.

 

"칼빈이 이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의 출판을 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슬픈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1534년 10월 17일 밤의 유명한 벽보 사건이었다. 미사를 반대하는 이 벽보는 파리 시내 여러 곳에

붙어졌고, 심지어는 궁전 문에까지 붙여졌다.

이 벽보를 작성한 사람은 느카텔 교회의 목사 '앙트완느 마르코르트'였다. 미사의 남용을 겨냥하고 만들어졌던

이 벽보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유일하신 중보자시요,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기독교 강요, 상, p.27)

 

이 벽보를 본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는 대노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여러 명의 복음주의자들이 화형을 당했고, 그 가운데 칼빈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여 돌보아 준

'에띠엔느 드 라 포즈'가 들어 있었습니다.

 

3. 사상적 배경

1) 칼빈 신학의 근원은 성경

"칼빈은 성경 전체를 면밀하게 연구하였다.

특히 '구약에 대하여'는 어느 다른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구약을 소홀히 하면 성경 연구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칼빈은 성경에 대한 충분한, 그리고 '완전히 소화된 지식의 소유자'라는 것을 그의 저서 매 페이지에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성경에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확신을 찾으려는 정열을 가진 신학자'였다."(p.34)

 

2) 교부들의 저작을 통한 영향

독서광이었던 칼빈은 교부들이 쓴 많은 서적들을 독파했습니다.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철학자들까지 두루 섭렵했습니다. 

칼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고,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은 크리소스톰입니다. 

크리소스톰을 고대 교부들중에서 성경해석이 월등했다고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에 대해서는 풍유적 방법을 제외하고 성경에 가장 충실한 해석자로 간주했습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자유의지와 성례관에서 영향을 받았고, 은혜와 예정을 다루는 각 장에서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논증을 자신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3) 종교 개혁자들의 영향

칼빈은 루터의 저서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의 구성이 루터의 소요리 문답의 순서를 따라 구성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경성, 예정, 교회, 그리스도, 성례관 등에서 현저한 불일치를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차이점은 루터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칼빈의 하나님 중심적 입장에서 

그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멜란히톤과도 많은 접촉점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교리인 자유의지와 예정에서 큰 차이점이 있었고,  

쯔빙글리와는 동질감을 같지 못했습니다. 

"쯔빙글리가 복음의 전파와 엄격한 지역적인 애국심으로 작용된 선입관을 혼동하고 있는데 대하여

칼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p.39)

 

마틴 부처와는 사상적 교감을 많이 이루었습니다. 

"칼빈의 구원관과 예정의 교리는 부처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문제들이었다. 

두 사람은 인간을 어떠한 선도 수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보고, 모든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하였다. 부처와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선택의 축복과 그 특성을 자아 속에서 

실현하기 위한 <분투적이며 자아 부정적인 노력으로 간주> 하였다"(p.39-40)

 

마지막에 언급한 '분투적이며 자아 부정적인 노력'은 칼빈신학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하는데 

큰 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롬7장의 자아 부정적인 그리스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