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칼빈신학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칼빈)

오은환 2018. 2. 24. 12:08

기독교 강요 3권, 17장에 나오는 주제입니다.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율법에 관련된 행위 : 고넬료의 예, 1-5>

1. 스콜라 논법을 서술하고 논박함

2. 우리는 행위로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다.

3.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을 통해서 실현된다.

4.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중으로 용납을 받는다.

5.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성경 다음으로 가치있는 책으로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여섯 번에 걸쳐서 보완되었는데 가장 뼈대가 되는 주제는 무엇일까요?

첫 판부터(단지 6개의 제목들) 나오는 율법과 복음 그리고 성례라는 주제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곳곳에서 복음과 율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변함이 없고 반복되어집니다. 

복음에서 멀리 떠난 스콜라 철학과의 논쟁은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하는것은...선행에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닻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후사들이 되어,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복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기독교 강요(중) p.346)


칼빈은 율법과 복음에 관하여 반복하면서 진리를 전달하려 합니다.

특별히 의를 얻는 것에 대해서 집중합니다.


"(율법의) 약속이 행위의 공로와 관련되는 동안은 아무 유익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폐기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으로 대치될 때에, 이 약속은 죄를 값 없이 용서한다고 선포함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될 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만든다"(p.349)


칼빈의 뛰어난 해석은 전적으로 구약 성경의 능통함에서 나온듯 합니다.

고넬료가 받은 의를 그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스콜라 철학자) 천사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한 말을, 사람이 선행에 대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사실상 고넬료가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을 보면, <이미 지혜의 영(성령)>의 조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바울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라고 가르친 의를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성령에 의해 성결케 되었다.

그에게 있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으나, 그는 이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

...하나님께서 행위 때문에 신자들을 받으시는 것은 오직 자신이 그 행위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p.351-352) 


<칭의를 행위에 연결시키는 귀절들을 검토함, 6-15>

6.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 

7.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를 말하지 않는가?

8.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는 이중의 가치가 있다. 

9. 이신 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 

10. 죄가 용서한 후에야 행위가 용납된다. 

11. 야고보는 바울에 반대하는가?

12.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 

13. 로마서 2:13

14.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15. 신자들은 완전한가?


6번의 제목을 보면 우리를 당황시키기도 합니다.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을 대조시켜 놓았습니다.

칼빈이 생각하는 옛 언약은 구약이 아니라 순수하게 율법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세분화시켜서 율법속에서 옛 언약 아래 있는 은혜의 약속을 분리시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자세하게 보면 칼빈의 의도가 보이는데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율법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의 책들 여러 곳에 보이는 약속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중에는 복음적인 약속도 많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의 시행에 직결된 것을

나는 율법의 약속이라 부르며, 이런 종류의 약속은(이름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선포한다"(p.353)


칼빈의 율법 이해는 매우 명료한 듯 하면서도 애매한 해석이 많습니다.

특별히 그가 율법을 어떤 상태에서 받았는지 명확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상태에서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을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주께서 율법에 의라는 영예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주가 주신 것을 제거하지 않고, 율법에 대한 복종이 의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또 각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의 일부라고 인정한다"(p.355)


하나의 예를 들어 칼빈의 생각을 보았으면 합니다.

칼빈은 사가랴와 그의 처 엘리사벳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란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들의 행위를 행위 자체의 성격에 따라서 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 분명하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생활이 거룩하기 때문인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지로 의 자체를 실행한다기보다 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므로,

그들의 의는 이신 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신 칭의가 그 근본이기 때문이다"(p.360)


이 부분을 더 쉽게 설명한 곳이 있습니다.

칼빈은 성도들에게 붙여진 의인이란 칭호를 악인들과 비교해서 평가하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서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악한 자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의를

주장한다"(p.366)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의롭다고 선언>했는데, 칼빈은 여전히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매우 겸손한 말로 들리지만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은 우리가 장차 지을 죄까지도

죄를 죄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용서하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처럼 <의인된 죄인>이란 칭호는 실질적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반감시킵니다. 

의의 기준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추락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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