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세(침)례파 운동 -
개혁주의 학술원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혁을 통해 오랜 세월동안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군림해왔던 수많은 체제들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등 비교적 온건한 개혁자들과는 구별되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운동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재세례파였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재세례파 운동은 독일을 중심한 루터의 개혁운동, 스위스를 중심으로 한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개혁운동이었으나 종교개혁의 서자 혹은 좌경적 개혁운동(Left-wing
Reformation)으로 불렀고, 종교개혁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거의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왔다. 적어도 193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사 관련서적에서 재세례파가 독립된 별장(別章)으로 취급된 경우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침례교 교회사가인 윌리엄 이스텝(William Estep) 교수는 “16세기 재세례파처럼 부당한 평가를 받아 온 종파는
일찍이 없었고, 이들은 잘못 이해되었기보다는 차라리 무시되어 왔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재세례파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재세례파 운동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1960년대이래 이들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재평가를 위한 논구가 일고 있지만 지난 400여 년간의 무시나 오해
그리고 부당한 평가를 불식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재세례파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1. 재세(침)례파의 기원과 역사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의 교회사 교수인 윌리암스 (George H. Williams)는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첫째는 루터파(Lutherans), 쯔빙글리(Zwinglians), 칼빈파(Calvinists) 그리고 성공회(Anglicans)
등에 의해 이루어진 온건한 개혁운동인데 이 개혁운동을 ‘행정적 개혁’ 혹은 ‘관료적 개혁’(Magisterial Reformation)
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종교개혁운동의 주류로 이해되어 왔는데 윌리암스 교수는 이들을 ‘고전적 개혁’(Classical Reformation)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콘스탄틴황제 이후 형성되어 온 소위 국가교회(state church), 곧 제도화된 교회
(established church) 안에서 관헌(국가 혹은 정부)의 지원이나 보호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지스티어리얼’
(magisterial)이라는 형용사로 개혁운동의 성격을 규정하였다.
두 번째로는 온건한 개혁과는 달리 다소 과격하거나 급진적이었던 여러 형태의 재세례파(Anabaptists), 신령파
(Spiritualists) 그리고 복음주의적 합리론자들(Evangelical Rationalists)들을 통칭하여 ‘급진적 개혁’(Radical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유럽의 오랜 국교회(國敎會) 전통을 거부하고 콘스탄탄 이전의 고대교회로의
복귀를 근간으로 하여 보다 철저하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래디칼’(radical)한 개혁운동으로
분류하였다.
윌리암스 교수의 이러한 분류방식은 그 이후의 교회개혁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교회개혁운동사에 있어서 이 양자를 구별하는 윌리암스 교수의 표준은 일차적으로 개혁자들의 교회론 혹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여 개혁운동을 전개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국가나 정부 등 세속권력집단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 왔느냐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즉 전자는 교회개혁운동에 있어서 제도화된 교회 안에서 세속권력과
제휴 혹은 지원을 얻으며 교회를 시민사회와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에, 후자는 서구의 오랜 국교회(國敎會)
전통은 거부하고 콘스탄틴 이전의 교회에로의 복귀를 근간으로 했고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를 배제하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종파주의자들(sectrians)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등의 주된 이념이 개혁
(reformatio)이라고 한다면 재세례파나 신령파 혹은 합리주의자 등 급진적 개혁자들의 주된 이념은 국가교회형태
이전으로 돌아가는 복귀(restitutio)였다.
재세례파의 유형
재세례파 운동은 한 지역에서 어느 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일한 개혁운동이 아니라 스위스, 독일, 모라비아,
화란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 운동으로서 이 운동 또한 몇 가지 유형과 분파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발트(Willem Balke)는 재세례파를 7개 분파로 분류하였고(각주1) 윌리암스 교수는 3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으나
필자는 오웬 차드윅(Owen Chadwick)의 분류를 따라 다음의 4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첫째, 쯔빙글리의 개혁운동 당시의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l), 펠릭스 만쯔(Felix Manz)를 중심으로 한 ‘스위스
형제단’, 둘째 발타샤르 휘브마이어(Balthasar Hübmaiar)와 한스 뎅크(Hamns Denk) 그리고 필그림 마르펙(Pilgrin
Marpeck)을 중심한 남부 독일에서의 재세례파 운동, 셋째 모라비아의 훗터 공동체, 넷째 화란과 북부독일에서의
메노나이트(Mennonite)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들 간에는 일치점과 상이점이 있고 거의 유사한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어난 ‘스위스형제단’이 재세례파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재세례파로 불리게 된 것은 유아세례를 인정치 않고 ‘신자(信者)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신자의 세례’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이들이 말하는 신자의 세례란 성인이 된 후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후 베푸는 세례를 의미한다. 즉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의미이다.
이들이 재세례파라고 불린 것은 유아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재 세례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재세례파를 칭하는 아나밥티스트(Anabaptist)라는 말은 희랍어 ‘아나밥티스모스’ 곧 ‘다시 세례받는
자’라는 의미에서 온 말이다. 이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한 것은 앞서 말한 바이지만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아세례를 받으므로 자동적으로 속했던 국교회 제도에서 떠나 재침(세)례를 받은 이들을
구별하여 별도의 교회를 구성하였다.
재세례파의 개혁의 이념이나 교회관, 국가관, 세례관 등은 개혁교회와는 매우 달랐다. 따라서 이들 재세례파는
당시 국가권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 온건한 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도 끊임없는
탄압과 박해를 받았고, 국가권력으로부터는 무정부적인 반란집단으로, 당시 교회로부터는 이단적인 종파운동으로
취급받아 왔다. 특히 칼빈은 재세례파를 천주교와 동일하게 이단적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교리를 비판하였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한편으로는 로마천주교를, 다른 한편으로는 재세례파를 공격하였다.
재세례파의 기원
제3장에서 살펴 본 바대로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쯔빙글리의 지도력 하에서 1523년 1월 29일 제1차 공개토론회가
개최하면서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1524년 6월의 제2차 토론, 1524년 1월의 제3차 토론이
있은 후 개혁은 크게 진전되고 있었다.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쯔빙글리와 함께 이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사람이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48-1526)이며 이때는 1521년 11월의 일이었다.
이 때로부터 쯔빙글리의 신약성경 원리에 기초한 개혁정신에 찬동하는 이들이 모여 성경을 연구했는데, 콘라드 그레벨
외에도, 펠릭스 만쯔(Felix Manz), 안드류 카스텔베르거(Andrew Castellberger)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고 이들은 곧 ‘형제단’으로 불리워졌다.
이것이 소위 ‘스위스 형제단’(Swiss Barthen)의 시작이었으며 재세례파 운동의 역사적 연원이 된 것이다.
이들의 개혁의지는 불과 3년이 못되어 스승인 쯔빙글리를 능가하였고 따라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만족하지 못했다.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의 개혁이 너무 보수적이었고 지나치게 점진적이라고 생각했다.
1523년 10월에 있었던 제2차 토론 때부터 그레벨 등 스위스 형제단과 쯔빙글리 사이에는 견해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견해차란 교회의 본질 및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이견이었다.
미사 및 성상들에 있어서도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쯔빙글리나 시의회와는 달리 스위스 형제단은 철저하고도
즉각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여기서부터 쯔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 사이의 분열의 조짐이 노정되어 갔다. 그해
12월 29일 쯔빙글리는 시의회의 점진적이고 타협적인 개혁을 지지했는데 스위스 형제단은 쯔빙글리가 시 당국의
정치적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진리를 유보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결국 쯔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 사이의 결별을 가져왔다. 2차 토론 이후 스위스 형제단들은 오직 ‘신자의 세례’를
주장하며 중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참 교회의 이상을 갖고 있었다. 블랭크(Fritz Blanke)에 의하면 콘라드 그레벨과
그 무리들은 이미 1524년에 신약성경을 기초로 하여 세례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는 점이 확인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재세례파 운동의 시작이었다.
쯔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찬동하고 이를 시행했는데 그 근거는 구약의 할례를 통한 부모의 언약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위스 형제단 지도자들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근거가 없으며, 8일 만에 행하는
수동적이 할례를 유아세례와는 근본적으로 동일시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525년 1월 그레벨과 만쯔, 그리고 스탬프(Simon Stumpf) 등 급진주의작들은 저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들로만
은밀한 화합을 가졌는데 이것이 스위스에서 일어난 재세례파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즐겨 모이던 장소는 노이스탓트(Neustadt) 거리에 있던 펠릭스 만쯔의 집이었다.
여기서 유아 세례의 타당성에 관한 진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국 유아 세례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이를 설교하게
되었다.(재세례파는 마음의 할례와 외적 할례, 성령세례와 물세례의 깊은 진리를 알지 못했다)
쯔빙글리는 이러한 사태의 발전을 보고 한편 놀라고 당황하여 재세례파를 비난하는 결렬한 설교를 시작하였다.
저들은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세속정부에 대한 견해도 온당치 않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쯔리히 시의회는 스위스 형제단의 재세례 요구는 법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로 보아 법적 조치를 강구하게 되었다.
1525년 1월 쯔리히 시 의회는 신자의 세례문제 때문에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1월 10일에서 17일까지 그레벨, 만쯔,
로이블린(Reublin), 블라우록(Blaurock) 등은 쯔빙글리와 블링거에 대항하여 세례문제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 토론의 결과와 관계없이 시의회는 1월 18일 쯔빙글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유아세례의 시행을 명했고 재세례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로부터 사흘 뒤인 1월 21일에는 로이블린, 해쩌(Haetzer), 볼티(John Botli), 카스텔베르거 등을 추방하고 그레벨과
만쯔에게는 어떤 학교나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바로 그 날, 즉 1525년 1월 21일 저녁,
10여명의 스위스 형제단들은 펠릭스 만쯔 집에 모였다. 이들은 쯔리히 시의회의 결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反)하는
속권의 발등으로 확신하고 이날 콘라드 그레벨은 게오르게(George of the House of Jacob)에게 처음으로 재세례를
베풀었다. 그레벨이 직접 재세례를 베푼 후 블라우룩은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도 재세례를 베풀었다.
이렇게 하여 스위스 형제단들로부터 소위 재세례파가 출현한 것이다.(재세례파 탄생 - 1525년 1월 21일 저녁)
이것은 교회개혁운동사에서 급진적 행동이었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 그리고 쯔빙글리파의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성인 세례만을 주장하여 재세례를 베푼 것이다. 로마 가톨릭 뿐 만 아니라 루터와 쯔빙글리와의 결별을 상징하고 있는
사건 가운데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었다.
개혁자들이 성경에 의해서(by)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려 한 것에서 진일보하여 성경으로부터(from) 얻은 진리로
새로운 교회 건설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은 국가 권력과 교회가 결합한 형태인 당시 교회로부터 떠나 개혁 아닌
혁명을 지향하였다. 이것은 관헌의 지원을 받은 개혁 프로그램에 반대하여 급진적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하나의
시작이었다.
2. 재세례파 운동의 주요 인물들
이렇게 시작된 재세례파는 중세교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보아 그 의미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역사의 비연속성
(discontinuity)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개혁의 목표는 초대교회, 특히 313년 이전의 기독교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는 초대교회에로의 복귀(Restitution)였던 것이다.
재세례파 운동의 초기 지도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 게오르게 불라우록, 휘브마이어
등이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8-1526, 28세)
스위스 형제단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그가 재세례교도로 사역한 기간은 겨우 1년 8개월 정도였지만 그의 기여와
역할은 과소평가 될 수 없다. 그레벨은 그로닝겐(Grüningen)의 행정담당관으로 있다가 후에 쯔리히 시의회 의원이
되었던 야콥 그레벨의 아들로 1498년에 태어났다.
그는 그로스뮌스터(Grossmünster)에서 6년간 기초 교육을 받고, 1514년 바젤 대학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글라리안(Glarean)이라고 알려진 인문주의자인 하인리히 로리티(Heinrich Loriti)에게 교육을 받고 그 후
4년간은 비엔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또 파리대학(1518년 9월말 - 1520년 6월)과 바젤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쯔빙글리를 만남으로써 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방황하던 인문주의자가 복음의 열정에 심취하게 되었고,
쯔빙글리 지도하에서 헬라 고전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레벨은 1522년 7월 이전에 천주교로부터 개종하였고, 이 회심을 통하여 그에게 내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레벨은 개혁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연약한 한 젊은 인문주의자는 이 회심을 통하여 열정적인
성경학도가 되었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1523년부터 교회개혁에 있어서 쯔빙글리와 견해를 달리 하였고, 1524년에는 불화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쯔빙글리는 성상이나 미사의 폐기를 시의회와 절충하려 했으나 그레벨은 관헌들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국가관, 교회관 등에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났다.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중생한 신자들로 구성되는 참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레벨을 중심으로 소위 ‘스위스 형제단’이라고 알려진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레벨은 1525년 1월 유아 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면 이를 반대하고 믿는 자의 세례를 주장하여 재세례를 행했다.
그는 만쯔와 블라우록과 더불어 재세례파 개혁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반면 쯔빙글리는 그레벨의 주장을 반박하고
유아세례와 계약신학을 옹호하는 4편의 글을 썼다.
그 대표적인 소책자가 「세례, 재세례와 유아세례에 관하여」(Concerning Baptism, Rebaptism, and Infant Baptism)와
「재세례파의 간교함에 대한 논박」(A Refutation of the Tricks of the Katabaptizers)이다. 그레벨은 쯔빙글리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 후 수없이 많은 투옥과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재세례를 베풀었고 성례를
집행하였다.
1525년 4월부터 6월 사이에는 투옥을 피하여 은거하던 그레벨은 그로닝겐으로 옮겨가서 사역하던 중 10월 8일 체포
되었고, 3주일 후에 체포된 펠릭스 만쯔와 더불어 1525년 11월 18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구속된 지 5개월 후에 감옥에서 쓴 원고를 출판토록 요청한 것이 화근이 되어 1526년 3월 5,6일 제 2차 재판을
받고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로부터 14일 후 어떤 사람의 호의로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탈옥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한
그는 1526년 여름 당시 유행하던 페스트로 사망하였다. 그는 여러 편의 편지들과 설교들, 그리고 또 한편의
소품(pamphlet)을 남겨두었다.
펠릭스 만쯔(Felix Manz, 1498-1527)
만쯔는 그레벨과 더불어 초기 재세례파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서 신교도에 의해 순교당한 최초의 재세례교도였다.
쯔빙글리는 만약 그레벨이 재세례교도들의 코리피어스(헬라의 합창극에서 주창자를 의미한다)라고 한다면 만쯔는
아폴로(Apolo)이고, 블라우록은 헤라클레스(Hercules)라고 하였다.
1498년경 취리히에서 출생한 만쯔는 에라스무스, 레오 쥬드(Leo Zud) 그리고 하인리히 불링거(H. Bullinger)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사제의 사생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특권 계층의 자녀들에게 부여된 교육적인 혜택을 받았고
그 결과 그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에 능통하였다.
1522년경에는 쯔빙글 리가 주도하는 신약 연구 모임에 참여하였고 로마교로부터 개종하였다.
1524년 10월 논쟁 이후 쯔빙글리의 개혁 프로그램에 불만을 갖게 된 그는 그레벨과 블라우록과 함께 재세례파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웅변에 있어서는 그레벨을 능가하였는데 그로닝겐, 추리히, 쫄리콘(Zollicon) 등지에서
유아세례를 비난하고 재세례를 베풀다가 투옥되었다. “ 그리스도교의 질서와 관습에 반대하고 재세례교 운동을 전개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1527년 1월 5일 토요일 익사 당하였다.
그리고 그의 재산은 시의회에 의해 몰수되었다. 만쯔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간증문과 18편의 찬송시를 남겨 놓았다.
또 익사 당하기 2년 전 추리히 법정에 제출한 문서인 항의와 변호」(Protestation und Schutzschrift)가 남아 있다.
이 글은 재세례교도들의 주장을 변호한 글이었다.
게오르게 블라우록(George Blaurock, 1491-1529)
블라우록은 그레벨이 병사하고 만쯔가 순교 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약 2년 반 동안 재세례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이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1491년 보나두츠(Bonaduz)에서 태어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로마
가톨릭교의 사제로서 1516년에서 1518년간에는 추르(Chur) 교구에서 트린스(Trins)의 대리신부(Vicar)로 봉사하였다.
그러나 1524년 취리히에 돌아올 때 그는 이미 결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쯔빙글리와 많은 토론을 가졌고 교회개혁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었지만 쯔빙글리의 개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 쯔빙글리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쯔빙글리보다 더 철저한 개혁자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스위스
형제단을 찾아갔고 그 일원이 되어 1525년 1월 그레벨에게 재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형제단에서 “제2의 바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만큼 대단한 활동가였다.
1525년 2월 7일 블라우록은 만쯔와 재세례를 받은 24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취리히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감금되기도 했고, 만쯔가 1527년 1월 사형을 당하기까지 함께 일하였다.
만쯔가 사형 당하는 날 블라우록은 태장을 맞고 취리히에서 추방되어 베른(Bern)으로 갔고, 여기서도 추방되어
다시 비엘(Biel), 그리손스(Grisons), 아펜첼(Appenzel)등에서 사역하다가 체포되어 4월 21일에 또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다시 티롤(Tyrol)로 가서 목회하는 동안 많은 지지자를 얻기도 했으나 1529년 8월 14일 인스브루크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때로부터 3주일 후인 9월 6일 화형을 당했다. 죄목은 교황이 내려주신 사제직을 버리고 새로운
세례를 설교하고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의식을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옥중서신의 형식으로 된 한 편의 설교와
두 편의 찬송가사 그리고 간략한 권고문을 남기고 있다.
펠릭스 만쯔가 참수 당하고 게오르게 블라우록이 추방되고 콘라드 그레벨이 병사핮 스위스 형제단은 지도자를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이 시작된지 불과 2년이 못되어 지도자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 셈이다.
이렇게 되자 재세례파 운동은 쯔리히에서 인접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재세례 교도들은
남부 독일, 모라비아, 폴란드, 독일 북부, 그리고 화란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이들은 계속하여 탄압과 순교를
당하였으므로 이들은 “순교의 순례자들”(Martyr's Pilgrims)로 불리기도 했다.
발타사르 휘브마이어(Balthasar Hübmaier, 1480?-1528)
휘브마이어는 훈련된 신학자로서 재세례파 운동의 뛰어난 이론가요 지도자였다. 1480년경 남부독일 아우구스버그에
가까운 프라이베크(Friedberg)에서 출생한 그는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수학하여 성경학 학사(Baccalaureus Biblicus)
학위를 받았고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엑크(John Eck)의 제자가 되었다. 엑크가 프라이브르크를 떠나 잉골슈탓트
대학으로 가자 그도 그곳으로 따라 갔고, 1512년 9월 29일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미 신부이기도 했던 휘브마이어는 대학교회인 비르긴(Virgin)교회의 설교자요 교목으로 임명되었고 3년 후인
1515년에는 대학의 부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1516년 1월 25일 일골슈탓트대학을 떠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발트슈트(Waldshut) 등에서 교구 신부로 봉사하였다. 그러던 중 1522년부터 바울서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바젤을 비롯하여 스위스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개혁운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복음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의 개종에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작품으로 받은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는 쯔빙글리의 개혁에 만족하지 못했고 특히 유아세례는 수용할 수 없는 국가교회적 제도로 보았다.
1523년 5월 그는 쯔리히에서 쯔빙글리와 유아세례 문제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때만 해도 쯔빙글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523년 10월에는 취리히에서의 성상과 미사 문제에 관한 토론에 참가하였고 성경적 월리로 돌아가려는 교회개혁 원리를
자신의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10월 논쟁 후 발트슈트로 돌아온 그는 개혁을 위한 토론을 위해 1524년 봄 ‘18개 조항’
(Achtzehn Schlussreden)을 작성했는데 이 문서는 그의 최초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도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Ferdinant Ⅰ)의 탄압의 손길이 뻗쳐 오자 은거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여러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 중에 1525년에 쓴 「이단자들과 그들을 화형한 자들에 대하여」(Von Ketzern
und ihren Verbrennern) 라는 글은 재세례파 운동의 중요한 이념인 자유의 개념과 통치자의 권력의 한계 등을 언급한
가치 있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휘브마이어는 하나님만이 누가 이단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고, 하나님은 세속
권력자에게 이단이건 아니건 간에 어떤 이를 화형 시킬 권리를 부여하신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적어도 그는 1525년 1월 이전에 유아세례는 실제성이 없는 헛된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하였다. 루이스 W. 스피츠는
휘브마이어가 1525년 1월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아세례를 폐지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
함으로써 신자들을 경악하게 했다.”고 쓰고 있다. 1525년 7월에는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 세례」(Vom christlichen Tauf
der Glaubigen)라는 책을 썼는데 이 글은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성인 세례의 정당성을 변호한 재세례파의
고전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해 11월에 쯔빙글리가 「세레에 대한 휘브마이어의 저서에 대한 참되고 철저한 응답」이라는 반박서를 출판하고 양자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을 보면 휘브마이어의 저서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탄압과 투옥 가운데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던 그는 취리히를 떠나 모라비아 지방의 니콜스브르크(Nikolsburg)로 갔고 이곳에서
1년간 사역하는 동안 약 6,000명에게 재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는 설교와 저술을 통해 크게 활동하였는데 그는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정부만이 무력을 행사할 권위를 가졌으나
영적인 문제는 교회의 고유한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배격하고 무저항 원리를 주장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이 반영된 저서가 「무력에 관하여」(Von dem Schwert, 1527)이다. 그는 또 재산의
공유를 반대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궁핍한 자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원리를 주장하였다. 즉 그는 무저항
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쯔 등 스위스 형제단과 다르며 재산의 공유(Community of goods)나 무정부주의
원리를 배격한 점에서 훗트(Hans Hut)나 비데만(Jacob Wiedenann)과도 다르다.
합스부르가에서는 지금까지 평화롭기만 하던 자기들의 영토 내에서 종교적 혼란을 방치해 둘 수 없어서 1527년
휘브마이어를 체포하였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후퇴하여 타협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1528년 3월 10일 비엔나 교회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다뉴브강에서 익사 당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성들에 대한 처형방법이었다.
그의 저서에는 금서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 운동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교회개혁 의지와 신앙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스부르그에서의 일어난 재세례파 운동은 휘브마이어의 사역의 결과였다.
3. 재세례파의 교의와 사상
지금까지 우리는 재세례파의 역사와 지도적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재세례파는 삼위일체교리, 유아세례 등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견해를 달리하지만 이와 같은 오도된 교리나 신학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재세례파 운동의 이념
혹은 개혁정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근본적인 문제
재세례파의 근본이념은 16세기 당시의 국가 교회(State-church)는 신약교회 원리에서 떠난 타락한 제도를 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원시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귀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베인톤은 “리포메이션(Reformation)
이란 말은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개혁파(Reformed)란 말은 쯔빙글리나 칼빈의 개혁운동을 지칭하고,
회복(Restored)이란 말은 재세례파의 이념이나 사상 혹은 개혁운동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복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원시교회는 오직 진실된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교회와 국가가 결합되기는커녕 도리어 박해받고 경멸당하고 거부당하는 순교자의 교회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국가교회 혹은 제도교회(Established
church)로부터 독립을 이루려는 일종의 자유교회 운동이었다. 재세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재세례를 주장한 것도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이것은 성인 세례 혹은 신자의 세례를 실시함으로서 국가교회 체제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교회관
교회의 복귀운동은 재세례파의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교회관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들은 신약성경 시대와
콘스탄틴 이전 시대의 교회를 참되고 순수한 교회로 보고 이 시대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도하였다.
그래서 리텔(Franklin Littell)은 이를 ‘원시주의’(Primitivism)라고 명명하였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국가와 타협, 야합하여 교회의 독립성을 누리지 못한 국가교회제도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이 비록 교회와 국가 간의 분리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념상의 분리이지 실질적
분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여전히 중세적이며 로마가톨릭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타락은 4세기 곧 콘스탄틴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교회와 국가 간의 타협
혹은 결합을 교회 타락의 가장 중요한 징표로 보았다. 이 타협을 통해서 교회는 더 이상 신자의 자발적인 모임이기를
거부하고 국가적 의식(유아세례)이나 강압과 무력정복에 의한 집단적 개종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세바스치안 프랑케(Schastian Frank)나 카스파
쉬웬크펠트(Caspar Schwenkfeld)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황제권의 개입의 결과로 영적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보았다.
재세례파가 말하는 타락한 교회의 두 번째 표징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수행된 전쟁이라고 보았다. 폭력은 어떤 이유나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며 또 무력을 사용하여 종교적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분명한
타락의 징표로 보았다. 그래서 저들은 무저항주의와 절대평화주의를 견지했던 것이다.
재세례파가 보았던 교회타락의 세 번째 표징은 삶과 예배에 있어서 형식주의(dead formalism)였다.
내적 진실성보다는 의식, 외적 웅장함 등 제도화된 교권체제는 교회가 타락한 증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저들은 단순한 의식과 간략한 성찬식 거행을 시행했다.
재세례파는 교회는 믿는 자들의 자의(自意)에 의한 모임이어야하며, 국가나 권력의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믿는 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통해 구성된 회중은 형제들(Brotherhood of
believers)이며 이 신자들의 순종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통해서나 혹은 공동체 안에서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순종하는 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상을 살펴볼 때 재세례파는 당시 자연스럽게 수납되었던 국가-교회 제도를 거부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국가와 구별된 전적으로 중생된 자의 모임이어야 했다.
세례관
중생된 자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고백된 신앙을 토대로 하는 신자의 세례관에 기초한다. 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새로운 생활을 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가장 명확한 경계선이 성경의 권위라고 한다면 재세례파와 개혁주의자들 간의 경계선은
‘신자의 세례’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각이 없는 유아들은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유아세례는 인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자의 세례는 제자로서의 삶과 교회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재세례파는 이 당시
유아세례란 국가와 교회가 결합한 상태에서 국가적 의식으로 행해졌으며 이것이 국가교회의 특징이라고 파악하였다.
모든 유아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아세례에 대한 거부는 시민적 종교에 대한 거부와 결합되었다.
교회는 시민사회의 종교적 규약(sanction)이 아니라 세계와 사회의 현 체제에 대립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할례와 세례를 동일시하는 것을 부인하고 할례에서 유아세례를 유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았다.
또 이들은 성경에서 유아세례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이것은 교황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보아 거부하였다.
세례는 교육, 믿음, 회심을 거쳐야 하는데 이런 것은 유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결단 없이 이루어지는 유아세례는 무효이며 따라서 성인이 된 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점은 1527년에 작성된 신앙고백문서인 슬라이타임 신앙고백(Schleitheim Confession)에도 명백히 드러나 있다.
세례는 회개를 배우고, 생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죄가 도망하여 진 것을 진실로 믿는 자들....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줄을 믿고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이 의미에 의하여 로마 교회의
극악한 교훈인 모든 유아세례는 배척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유아는
물세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믿는 자의 세례’는 회심의 표로서 교회 회중이 되는 데 필수조건인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을 가리켜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 Wiedertaufer)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위스 형제단에게 있어 세례란 전통적 의미에 있어서의
성례라기보다 일차적으로 제자로서의 순종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개하고 그의
마음이 변화하며, 그 결과로 새로운 생을 살아가기 열망하는 자에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휘브마이어에게 있어서 세례는 “공적인 신앙고백이며, 내적인 신앙의 증거”였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는 회개와
함께 신자의 순종행위가 수반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아세례를 반대하였으며,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그 누구도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필그림 마르펙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할례는 옛 언약의 표이며, 언약 할례는 중생한 자만이 받을 수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결과이며, 따라서 믿음 없이 받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재세례파의
성경관, 가견적 교회관, 제자관은 세례에서 그 중심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세계관은 재세례파 운동의 뚜렷한 표식이 된 것이다.
국가관
재세례파는 국가는 “이 세상 나라”(the kingdom of this world)에 속했다 하며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것은 소위 그리스도의 나라와 이 세상나라를 구분하는 두 왕국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서 교회와 국가(세상)를 절대적 대립의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교회관과 국가관의 핵심이다.
이 점은 슬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와 훗터파 대 신조서(Great Article Book)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슬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밖에서는 검을 사용하도록 정하였다.
그리하여 검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여 죽인다. 또한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율법에서 검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사형에 처하는데 사용하도록 정해졌듯이 이는 세상 군주들이 사용하도록 정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 13장은 세속권위에 대한 그들의 논의의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세례파는 일반
적으로 세속정부가 하나님께 복종하는데 반대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속정부가 이들을 탄압, 박해하고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유린할 때 이들은 보다 높은 소명(higher calling)에
순종하기 위해 세속정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슬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는 국가관의 문제에 대해 특히 3가지 점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인 악한 자에 대항하여 검을 사용할 수 있는가,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일에 대해
불신법정에 설 수 있는가?
셋째로는 그리스도인이 세속정부의 위정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세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여 세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즉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요 하늘의 시민이라는 점이 이 해답을 함축해 준다.
결국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문제였다. 이들은 중생한 자가 신자의 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되고, 회원이 된 자는
복종과 제자됨에 대한 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공유(共有), 공생(共生)의 공동체(행2:42-47)를 꿈꾸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무저항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하였다. 로마의 탄압과 박해 하에서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적 입장에 서 있었다. 슬라이트하임 고백서와 훗터파의 대 신조서에는 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메노 사이먼스(Meno Simons)는 진일보하여 중생한 신자는 싸움으로 남을 속박하거나
전쟁에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메노나이트파는 집총과 병력의무를 기피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평화주의
(Pacifism)와 반전(反戰)사상의 근대적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재세례파는 개인의 신앙과 양심이 국가에 의해 속박될 수 없고 하나님 아래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종속적 권위로서의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관헌(官憲)에 대한 재세례파의 견해는 대개 정교 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종교적 양심의 문제에 대한 강제력 사용을 반대한다. 또 무력이나 폭력의
사용은 금지하며 그리스도인은 양떼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그들의 신앙원리 속에 종합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각주>
1. 예를 들면 Willem Balke는 재침례파를 7개 분파로 분류하는데 1) 토마스 뮌쩌와 쯔비카우의 예언자들
2) 스위스 형제단 3) 모라비아 공동체, 곧 후터파 4) 멜키오르파 5) 뮌스터의 재침례파 6) 메노나이트파
7) 데이비드 조리스파가 그것이다.
또 G. H. Williams는 재세례파를 1) 혁명적 재세례파 2) 정숙적 재세례파 3) 복음적 재세례파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출처 : 은혜로운 주제별 성경요절 글쓴이 : 김동호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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