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라이트의 하나님의 나라는 매우 유명한 책으로 성경의 중심을 관통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책을 쓴 이유는 매우 절박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관념은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어느 정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분이 의도하신 목적을 거의 파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두 가지 목적을 드러냅니다.
①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는 것
②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의미속에 살아 가도록
1. 유대인의 중심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많이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정의를 내린 적이 없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반면 이방인들에게 이 단어는 아주 생소하다.
다윗과 이전 모세의 유산속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신앙의 근원이었다.
특별히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오직 그만을
섬기고, 그의 언약의 법에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한 국가로서 그 역사를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법 아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관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고,
그것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관념도 시작된다.
(좀 아쉬운 것은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까지 올라갔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개념들은 지극히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진행은 전인적인 복종 한도내에서 이루어졌다.
단지 율법의 외형적 준수나 제사제도, 할례등 외형적인 제도를 넘어선 깊은 만남이다.
사사시대는 초기 이스라엘의 신정정치를 표상하며, 지명된 대표자를 통해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였다(삿8:23). 사사의 특징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카리스마이다.
2. 다윗왕조와 하나님 나라
왕정시대부터 지도자의 자격은 카리스마나 백성의 전적인 뜻이 기준이 되지 않았다.
중앙집권적인 예배, 성전, 제도등을 통해서 정치와 종교가 밀접한 관계에 이르렀다.
즉 구가는 제의를 지원하고, 제의는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
다윗이 이룬 통일왕국의 향수가 이스라엘 후대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나 번영된 다윗 왕국으로 이스라엘이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를 대처할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자주 말한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상관이 있느뇨"
3.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
아모스는 하나님의 백성 및 나라를 이스라엘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불경적 입장이라 천명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을 욕되게 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아니고 영원히 지속될수 없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과 포로생활은 곧 이스라엘 국가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정립케 한다.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한 나라는 유다왕국 및 그 성전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국가와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의 패배가 아니다.
국가나 민족이 그 자체로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이사야는 불같은 시험 속에서 단련되고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순수한 남은 자의
관념은 모든 개념 가운데서도가장 특징적인 개념으로 본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상화된 다윗 시대가
아니라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축복의 회복으로 묘사된다(사11:6-9).
선지자들은 남은 자들의 관념속에서 혈통적 이스라엘과 참된 이스라엘, 현실적 이스라엘과 이상적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였다. 예레미야는 언약적 유대관계는 외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율법에 대한 외적준수로부터 내적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공적 예배, 희생제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행위와 진리 안에서 신적인 왕의 지배에 복종시키는 세계에서만 오직 주어진다.
정리해보면 유대인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파괴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이렇다.실로의 성전 파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파괴, 티도 장군에
의한 성전 파괴, 역사속의 교회들의 몰락...,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개념을 확립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성전, 예배, 할례, 외형적 율법준수와 같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내적인 관계가
지켜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성전이나 교회가 파괴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 나라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희생제도나 성전의식은 예배의 중심이 아닐뿐더러
예배의 본질적 부분도 아니다. 예배의 본질은 순종과 정직이다.
4. 율법과 하나님 나라
포로귀환 이후 유대 공동체는 빈약했다. 초라한 성전재건과 가난한 생활, 끊임없는 강대국의 공포 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율법준수와 묵시문학에서 유래한 종말론적 대망으로 전환하였다.
주변 나라들에 대한 동화의 공포는 이방인과 분리 및 민족주의로 불가피하게 변했다.
율법준수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은 랍비들을 통해 많은 울타리를 치게 만들었다.
유대교 윤리는 율법주의로 흐른다.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동기와 목적과 정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법전화시켜진 대로 행한다.
이런 법전을 형식적으로 지킴으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율법의 외형적 준수를 통해서 율법의 의를 얻고자 했다.
5. 선지자와 하나님 나라
모든 선지자나 사도들 특히 바울의 책망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의 외적 및 의식적 행위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외적인 것에 근거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모세가 율법에서 이렇게 말함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로 대조했다.
(이 부분은 저자의 오해가 크다.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유대교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의는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전적인 헌신을 드리는 문제이다.
6.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하나님 메시아(예수)
메시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실현을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고난>이었다.
율법이 추구하려고 했던 의를 고난의 종의 희생적 순종을 통해 성취했다.
7. 복음과 하나님 나라
메시아는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될 수 없다.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현실화 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현재적 사실이 되어 있다는 주장이 복음 메시지의 진정한 핵심 속에 놓여 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은 우연한 것도 아니고 지엽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그의 인격에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적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가 현 시대 속에 침투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예증들이다.
즉 현존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강력한 활동들이다. 그것들은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다.
원수의 지배 - 질병, 광기, 죽음 그리고 죄의 사슬로 사람들을 구속한 - 가 풀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강력한 사역 안에서 그 나라의 능력은 세상 속에 들어왔다.
신약성경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이해되어진다.
결단을 요구하는 현재적 윤리이다.
현재의 질서속에 침노하는 새 질서이고, 사람들에게 그 백성이 되도록 초청하는 새 질서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 속에 침노한 하나님 나라에 입각하여 마치 종말이 내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매일의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즉 종말론적 삶에로의 부르심이다.
신약성경의 윤리는 이러한 사실 속에서 보면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터져나왔던 옛 언약의 윤리적
요청들과 같다. 그 윤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참 백성임을 보여주는 수단이다.
8. 교회와 하나님 나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에 순종한 예수님 주변의 몇몇 사람들 속에서 시작하였다.
옛 언약 자체에서 그리고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구약적 소망 속에서 시작되었다.
교회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에 적합한 참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이 성취되었다.
승리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의 참된 상속자인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높인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다. 유대인들이 자랑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 복종, 지배 받는자라는 것이다.
내적인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 할례, 성전, 법궤, 율법등 외적 표지에 의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적인 것이 무너지면 외적 표징은 하나의 치장에 불과하다.
오늘날 교회는 구약의 유대인들처럼 교회자체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무너지지 않고, 안전하고 번영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구약의 유대인들이 가진 고정관념과도 같았다. 이것 때문에 선지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참된 회개로의 외침이 무시되었고, 순교적 제물이 되었다.
9. 세상 끝날까지
초대교회는 자신을 이스라엘의 계승자, 참된 남은 자 그리고 새 언약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1:1), 하나님의 이스라엘(갈6:16), 은혜로 택함 받은 남은 자(롬11:5),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다.
또한 고난의 종의 사명을 알았고 종말론적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정말 생소한 개념으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 참된 남은 자, 새 언약의 백성이고 이스라엘의 소명과 본분의 계승자이다.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수행할 때만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약속들의 기업이 된다.
교회는 하나의 조직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모든 조직들의 총회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의 유기체이고, 신앙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가시적 교회들은 고통을 당할 수 있고 항복을 할 수 있으며 파멸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가시적 교회는 죽일 수 없다.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해보면 교회는 그의 의를 드러내도록 세상 안에 그 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들은 그것의 언약적 교제로 초청하는 책임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참된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과 종의 백성으로 이해하였다. 그 교회에 모든 약속들이 주어진다.
교회와 모든 프로그램들은 모두 신앙이 선포되고 원하는대로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가 세상에서 확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의 첫 번째 프로그램은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관념 앞에 서서 교정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프로그램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10.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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