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서론
오순절 부흥운동은 알미니안 감리교회 지반에서 발생하였다. 알미니안 감리회 신학에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에서
인간의 주도성에로 강조점이 넘어옴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쟁취된다.
인간의 주도권이 은혜를 결정하는 완전주의 지반에서 오순절 운동이 발생했다. 사람의 노력이 은혜를 결정한다.
인간의 선한 종교적 노력이 성령 세례를 획득하되 노력과 열성의 정도가 성령의 양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영웅적 노력을 한 사람이 넘치는 성령을 받아 배분한다.
따라서 오순절파에서는 통상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중심에 선다.
제 2 장 오순절 운동의 시작과 확산
1906년 4월 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흑인 감리교회 목사인 윌리암 씨모어 목사의 부흥회로
시작하였다.
그는 방언운동을 처음 출발시킨 찰스 파함 목사에게서 배웠다. 그 후 이 운동은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다.
많은 목회자들이 아주사 거리로 모여 들었고 성령을 체험한 이들의 열정으로 세계로 급속히 그리고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은사운동은 성령 세례와 함께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은사가 강조됨으로 그 이름을 얻었다.
이 운동은 1960년대에 카톨릭 교황청까지 영향을 주었다.
제 3 장 오순절 운동의 신학 : 중생 후 성령세례
오순절의 주장은 중생 후 성령 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방언이 성령 세례의 증거가 된다.
성령 세례는 오순절의 반복으로 본다. R.A 토레이는 성령 세례는 모든 신자들의 출생권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은 자기의 출생권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 세례는 예수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첫 믿음을 넘어가는 조건들 이행을 필요로 한다.
토레이는 계속해서 성령 세례는 중생 사역과 구분되고, 부가 되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능력을 전달 받아 봉사에
적합하게 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조건들을 이해해야 이러한 자격을 얻게 된다. 토레이는 7 단계로 성령 세례 받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와 주로 받는 것이다
② 죄를 폐기 하는 것이다. 즉 죄를 버려야 한다
③ 죄를 폐기함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을 공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④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양도이다. 마음의 순종은 의지에 있고 순종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 양도하는 것이다.
⑤ 성령 세례에 대한 열렬한 갈망이 필요하다
⑥ 결정적인 기도이다.
⑦ 믿음이다. 처음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꼭 받겠다는 믿음이다.
- 위의 조건들을 다 이행하고서 성령 세례 받는다고 믿으면 받는다는 것이다.
토레이의 경우는 조건 충족 후 성령 세례 받았다고 믿으면 그 세례를 받는 조용한 현상이지만, 오순절파는 황홀한
경험과 방언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토리는 1926년 오순절 운동을 거부하고 정죄 하였다.
19세기 부흥운동을 미국 교회의 생활과 성장의 법으로 정착한 찰스 피니(1792-1875)는 장로교회에 감리회
사상과 실천을 침투시켜 웨슬리의 알미니안 신학을 보편화 하였다.
그는 법정적 칭의를 거부하고, 성화를 칭의의 근본으로 삼게 됨으로 완전성화를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의해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성령 세례가 완전 성화에 이르게 하는 제 2 의 축복을 대처하게 하는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했다.
피니의 후계자라고 할 D.L 무디는 성령 세례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봉사를 위한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다.
무디의 동역자인 토레이는 성령의 이중 역사를 강조하고 성령 세례를 봉사와 증거를 위해 위로부터 능력
입음으로 확정하였다. A.B 심슨은 성결운동의 기본교리가 된 중생, 성화, 신유, 재림의 4중 복음의 성화자리에
성령 세례를 대치하여, 중생, 성령 세례, 신유와 긴박한 재림의 4대 교리를 순복음(Full Gospel)으로 세우므로
오순절 교단들과 신학이 세워지게 되었다.
웨슬리(1703-1791)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교리는 성화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목표로 하고서 감리회가
설립되었다. 성화는 그냥 거룩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성화를 목표로 하였다.
완전 성화는 특별 은혜를 입어 순간적으로도 가능하고 점진적으로도 이루어 진다.
이 완전 성화에 있어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도적으로 일한다.
인간이 자기 구원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도적 노력 없이는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푸시지
않으며, 구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제 4 장 오순절의 성령 강림 :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 받아 메시야로 임직되었고, 메시야 시대 곧 구원 시대가 열려졌다.
이 성령은 새 인류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고, 그 성령이 그의 몸인 교회에 부어지기 위해서는
그의 구속 사역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 파송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후에만 가능하다.
(서 교수님은 구약 성도들에게는 개인적인 성령의 임재는 없다고 주장한다. 노아 홍수 때 성령이 떠나갔다고
(창6:3) 주장한다).
서 교수님은 구약 시대에는 성령이 회막안에만 거하신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도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에 의해 그 죄가 완전히 속량되지 못하였음으로 백성들 가운데 임재 곧 성령의 거주를
가졌지만, 그 백성들 각자가 성령의 내주는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오직 성령의 각 개인에게 내주함은 신약 시대에만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신약 교회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견해를 밝힌다.
(이스라엘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에 뿌리는 둔 신약 교회 공동체의 탄생을 목표로 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롬9-11장).
제 5 장 신약의 증거들 : 믿음으로 성령 받음
예수님을 원 보혜사로 본다. 구원사역의 완성 후 파송되는 보혜사 성령에 앞서서 예수님은 자신이 원 보혜사가
됨으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제자들 포함)을 중생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확증 구절을
요14:16절로 본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다른” 이란 말을 보면서 이것을 원래의 보혜사로 본다. 그래서 예수께서 원 보혜사라고 말씀하신다.
(저의 견해)하지만 이것은 문맥속에서 해석을 해 볼 때 많은 모순을 품고 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구함으로 파송되는 보혜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다른”이란 말을 어떻게 보는 것이 적합할까? 구약에 파송된 아버지의 성령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그 성령은 구약성도들을 중생, 성화,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물론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보게 하는 한시적인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히9:8).
마치 율법이 주님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인 역할속에서도 그 사명을 다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구원사역이 완성되면
그 일들을 세상 가운데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다.
계3:1절에 “하나님의 일곱영을 가지신 이”로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구원사역을 완성한 후 아버지께 위임 받은 성령이 곧 예수의 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제 6 장 성령세례 = 성령 받음
제 7 장 성령 받음 = 선물로 받음
제 8 장 성령 강림의 목적 : 하나님의 거소 마련
노아의 홍수로(창6:3) 인해 사람에게서 성령이 떠났다고 본다. 그래서 수명도 확 줄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에 셈의 자손만이 장수한 것은 성령의 임재가 원인이라 보고 있다(p.134). 하지만 이런 이론은 문제가 많다.
오늘날 성령의 임재를 받는 신자나 그렇지 않은 불신자나 수명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구약 성도에 대한 견해는 이렇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언약 백성이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은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의 법칙들을 지킴으로 되었다.
이스라엘의 거룩은 외적 거룩이요, 의식적 거룩임으로 내면에까지 완전히 거룩해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성막을 치고 거하셨고 백성들 각자 안에 내주하지 못하셨다(p.140).
이러한 견해는 저자의 또 다른 견해와 모순된다.
성령의 내주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불가능하다(p.140)고 한편에서는 언급하면서 외형적 의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구약성도들이 나아갔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모든 것이 구약 성도들 가운데 임한 성령의 부재로 보는데서 기인된 것이다.
구약 성도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구약은 한없이 폄하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구약의 공동체를 구약교회라는 명칭으로 전혀 부르지 않고 있다.
구약 시대의 공동체는 곧 구약교회이다.
교회속에 성령의 역사함이 없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바울사도는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9:4)
제 9 장 성령의 내주 = 지속적인 인격적 관계 맺음
제 10 장 성령 충만 = 성령의 지배
성령 충만은 행13:52의 예로 중단되었다.
그 후로는 성령의 역사가 처음처럼 그렇게 힘있게 전개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자주 성령의 역사가 중단됨을 이야기 한다.
초대교회 은사의 중단도 은사의 오용때문이라 말한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말은 성령님은 그렇게 약한 분일까하는 것이다.
죄인들 가운데 오신 성령님은 처음부터 인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셨고 그분의 역사로 인해 어두움을 몰아내지 않았던가?
이러한 주장은 결국 불신앙이라 볼 수 있다. 성령의 역사를 못 믿는 것이 된다.
제 11 장 성령의 인침 = 구원의 보장
제 12 장 성령 받았음의 증거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
제 13 장 성령의 사역 : 전도와 성화
제 14 장 성령의 능력 = 복음전도의 능력
저자의 견해는 기적과 치병과 은사들도 성령의 나타남의 표현이지만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이다.
주 예수의 복음 증거와 복음의 확증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사용될 뿐이다(저자의 하나님 나라 이해).
오직 성령의 능력은 예수 복음을 전파하는 능력이다(이것으로만 성령의 능력을 한정시킨다)
제 15 장 능력의 길 : 기도
제 16 장 능력의 소실
제 17 장 성령의 은사들
은사에 대해 두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연적 은사 복원과 새로운 은사수여이다.
모두 교회를 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그렇게 작정되었다(은사를 교회와만 연관시켜 생각한다.
이한수 교수처럼 은사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먼저 설정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본다).
방언과 예언과 지식의 은사는 성경 완성과 더불어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특이한 것은 방언에 대한 견해이다.
방언을 주신 목적이 유대인들의 불신과 연관을 가지려 한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전환되는 것을 증거하려고 방언이
시작되었고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방언의 은사가 오용됨으로 중단되었다고도 본다(p.202).
또한 통변의 은사가 적어서 방언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성령의 역사를 무기력한 것으로 간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 18 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
* 더 많은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했으나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서교수님의 성령 신학의 난제는 구약에 임한 성령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노아의 홍수로 인해 성령의 개인적 내주가 떠나 버렸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없다고 주장한다.
구약 성도들의 구원은 외형적, 의식적 언약을 수행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즉 내면을 새롭게 할 성령의 역사가 없이도 구원에 이르는 난제를 만들어 낸다.
성령이 없는 성화, 즉 거룩함을 구약 성도들은 언약에 의해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근원적 차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까지 영향을 미친다.
공생에 기간에 활동한 제자들의 중생은 원 성령(보혜사)인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원 보혜사임을 매우 강조한다.
이것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을 이해함의 부족에서 온 것이라 본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요14:16).
이 말씀에 대해서 서교수님은 다른 보혜사가 예수님이 보내는 성령이고, 원 보혜사는 예수님 자신이라 말씀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낸 보혜사를 예수님의 제 2 의 자아라고까지 표현한다.
조금 더 나아가면 예수님이 보낸 보혜사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기도 한다(p.233-237)
구약 성경 속에 활동했던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그 정체성과 활동 범위를 잘 파악한다면 이해가 훨씬 바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은 성령(하나님의 성령, 영)을 보내어 창조된 피조물들을
그 창조 질서의 본연대로 섭리하시는 일을 하셨다.
또한 구약의 택한 백성들을 중생케 하시고, 그들을 거룩함으로 성화시키며 성도를 견인했다.
성부께서는 자신이 보내신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구약 성도들을 다스리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이스라엘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게 하고, 그 때까지 그림자들을 통해서 실체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 주목적이다.
즉 성령의 계시가 실체이신 주님이 오시기까지 한정적인(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음) 모습으로 보여 주셨다.
-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민11:17)
성부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령(영)을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완성으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증거하는 보혜사로 보내신 것이다.
보혜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분의 통치 가운데로 성도들을 인도함으로 실제 지금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도 쓰지만, 조금 더 풀어쓰면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서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주님의 재림 후에 사탄을 멸하는 그 시점에 아버지께
돌려 드린다(고전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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