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를 드린 후 성전에서 말씀대로 행했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공적인 고백입니다.
특별히 삼년째 십일조 즉 성전으로 가져가지 않고 자신의 도시에서 사용하는 용도에서
이런 고백을 요구합니다.
*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하지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신26:13)
삼년째 십일조를 행한 후 하나님 앞에서 공적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요구를 원하셨을까요?
성전에 드린 십일조는 바치는 것으로 책임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매 삼 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는 자신이 직접 그 물질을 나누는 일을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사랑함과 그것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랑을
물질을 통해 실행하는 것은 큰 가치가 있습니다.
단순히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눌 실체들을 찾아 이리저러 다니며,
또 마음을 쏟아야 하는 사랑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십일조에 대한 개념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보이는 성전이 사라진 상태에서 우리는 어떻게 십일조를 이해해야 할까요?
십일조 제도를 폐지해야 할까요?
신약 교회에서 십일조를 실시했다는 구체적인 말씀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헌금이해는 철저하게 구약이해에 근거합니다.
십일조와 같이 소득에 따라서 하라는 것입니다.
* 성도들의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전16:1-2)
다른 곳에서는 헌금에 대해 즐겨 내라는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사랑합니다(고후9:7).
각 사람의 소득(수입)에 따라 헌금을 드리는 것은 십일조의 원리와 같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이나 고린도 교회의 수입에 따라 모은 헌금은 구제를 위해 사용합니다.
사용하는 용도 역시 십일조와 유사합니다.
매 삼 년 마다 실행되었던 십일조 형태는 장차 신약교회가 행해야 할 십일조 유형을 미리 보여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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