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이후 초대교회는 난처한 상황들이 많이 있었음을 보게됩니다.
바울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었고,
율법의 전통에 의거해서 생활했습니다(행21:20).
바울 역시 그런 유대인들을 위해 율법에 따라 결례의식을 행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생각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 같이,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자유롭게 생활합니다.
문제는 바울이 선교지에서 만난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할례를 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례로 대처해서 할례가 불필요한지를 확실하게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할례가 더 이상 불필요함을 광범위하게 선언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행21:21)
종교개혁에 동참했던 자들이 한 마음으로 달려가야 하는데, 개혁의 속도 차이로 많이 갈라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온건한 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이러한 속도의 차이가 있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니면 핍박을 피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을 했는지 그 속마음은 잘 모릅니다.
*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행21:20)
바울은 할례의식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았습니다(갈6:15).
더 나아가서 할례의식을 폐하라고 주장함으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갈5:11)
바울이 할례에 대해 이렇게 반대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복음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갈5:2)
쉽게 말해서 실체가 왔는데도 주목하지 않고, 여전히 그림자였던 관습들을 쫓아간다면 실체를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이 실체이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그림자입니다(골2:16-17).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주님의 오심으로 폐하여진 것입니다.
세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성된 것이며, 구약의 제도들은 그 역할이 끝이 난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지성소 앞에서 이방인들이 들어오기까지 기다렸던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 시점이 되었습니다.
구속사역이 완성됨으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기다렸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지성소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처럼 그렇습니다.
① 옛 언약이 그 역할을 끝내고 새 언약으로 완성되었습니다.
② 글로서 기록된 그림자로서 율법이, 실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으로 더 이상 글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③ 보이는 성전 또한 더 이상 그런 용도로는 불필요합니다.
제사장들이나 봉사하는 레위인들이나 성전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④ 동물을 잡아 드렸던 피의 희생 제사들도 예수님이 단 번에 자신을 드림으로 완성되었습니다.
⑤ 그림자로서 절기들도 모두 예수님을 가리키었는데 이제는 실체가 오심으로 다 완성되었습니다.
⑥ 할례 또한 그 역할을 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할례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외적으로 인친 것이 할례라고 정의합니다(롬4:11).
이 제도 역시 한시적입니다. 이제 이방인들까지 모두 참여한 의식은 세례로 완성되었습니다.
세례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함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자신의 믿음을 근거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합니다.
단순한 의식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라 명하십니다(마28:19, 눅24:47)
*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6)
바울 역시 믿음을 가지자마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베풀었던 자는 그의 눈을 뜨게 안수했던 아나니아입니다.
*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믿음이 없는 자들은 바울의 권면을 왜곡하기 쉽습니다.
제도를 폐하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이 모순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바울을 대적하여)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행18:13)
진리를 알고 그것이 정착하는데는 분명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의 흐름 가운데 선한 목적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인내와 사랑으로 예루살렘 교우들을 기다려주었던 바울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랑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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