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레위기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말은?

오은환 2014. 3. 4. 16:50

레위기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그 제사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많이 나오는 단어는 <깨끗하다 - 코쉐르>로 186 회, 그 다음으로 <거룩하다 - 코데쉬>가 150회 나옵니다.

두 단어는 맞물러 있어서 서로를 연관시켜 생각하게 합니다.

 

1. 깨끗하다 - 코쉐르

 

죄인이 깨끗케 되는 길은 오직 하나 피흘림을 통해서입니다(히9:22).

다른 길은 없습니다(요14:6).

구약에는 동물의 피 흘림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이들 동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상징합니다.

단순히 동물의 피가 아니라는 것은 여러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동물이어야 하고, 특별히 흠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동물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전가시켜야 합니다.

이런 의식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초대한 것입니다.

 

성막으로 보면 제단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제단에서 이런 의식들이 집행됩니다.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속제제물 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2. 거룩하다 - 코데쉬

 

피흘림을 통해 깨끗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곧 바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성령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내주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대속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들은 이제 성령이 내주하는 거룩한 성전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나 야고보가 인용한 <성도의 성전됨>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고후6:16, 약4:5).

다른 수많은 구절들이 이것을 증언하지만 특별히 두 구절은 매우 정확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만듭니다.

 

성막으로 보면 성소의 사역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촛대(성도)와 촛불(성령)은 하나입니다.

성도와 성령의 연합은 결코 분리 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상태에서 성도는 성령의 조명으로 맞은 편 떡 상을 보게 됩니다.

즉 말씀을 조명받고 분향단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내주로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는 눈이 여기까지 열려질 때 비로서 <완성된 형태의 성경관이 형성> 됩니다.

 

3. 깨끗함과 거룩함은 동시에 이루어지며 병존한다

 

깨끗함과 거룩함은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의 시간적 차이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할 또 다른 의식은 없습니다. 성령을 주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곧 바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의 상태를 간단하게 묘사합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을 강조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주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성령과 연합을 통해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억압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는 것은 성령의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은 자연인이 이스라엘을 질책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이기에 그런 채찍을 꺼낸 것입니다.

 

4. 구원은 깨끗함과 거룩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흔히 구원에 대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오직 깨끗함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견해> 입니다.

그 후에 것에 대해서는 그리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타락을 가져온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자들의 견해는 성경을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벗어나 버립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두 가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구원이 <성령 안에서> 성취된다고 말씀합니다(엡4:30).

성령을 주심은 우리 구원의 <보증>입니다.

 

인간의 행위 구원이란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 이루어진 오직 그 길만이 깨끗함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내주를 통해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마7:21, 12:50)

 

이러한 경륜은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의 수고(행위)는 절대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 공급하는 힘이라 정의합니다(골1:29).

우리 성도들이 행하는 힘의 근원은 성령입니다. 

   

레위기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요?

구약 백성들이 예수 안에서 그 피로 속죄함을 먼저 받았고(갈3:8, 히4:6),

그 결과 성령의 내주가 시작되었기에(갈3:14) 거룩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세상 어느 나라 민족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단순히 생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이 함께 하셨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습니다(신32:6, 갈4:6).

성령이 함께 하시기에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고후6:16, 약4:5, 엡2:18,22).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이런 축복을 보면서 그들 자신들도 구속의 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닌 메시아의 자신을 드림으로 그 날을 보게 된 것이 이방인의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