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 |
1. 여자가 낳은 자 중의 가장 위대한 자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자로 세례 요한을 추천합니다.
위대한 메시아의 등장을 알리는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근본이며 실체이신 메시아를 소개하는 자로서
큰 사명을 받은 자임을 드러내줍니다.
2. 천국과 비교되는 세례 요한
혈통적으로 볼 때 가장 위대한 사명을 가진 세례 요한이지만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훨씬 더
미약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부분은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 자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적으로 가장 위대했던 세례 요한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 A
(이 세상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낮았던 모든 자들도 포함됩니다)
천국에서의 지극히 작은 자는 그것을 유업으로 받았던 사람을 대표합니다 - B
(천국에서 큰 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비교는 결코 세례 요한을 깍아내리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B의 가치는 A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청중들(사람들)은 보이는 것의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거나 먼 미래에 있을 것의 가치는 그 만큼 소홀히 대합니다.
A를 대표하는 혈통적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라고 본다면,
B를 대표하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는 혈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목적을 이룬 자로서
가치를 보게 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 즉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난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의롭게 되고, 성령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이 목적입니다.
넓은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천지창조는 인류에게 영원히 주어진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을 통해서 거룩함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3. 복음서를 통해 드러나는 비교 구문
1) 예수님의 모친, 형제들과 하나님 나라에서 맺어질 지체들의 비교
세례 요한에 관한 화법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그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을 때를 주목해서 보십시요.
분주한 공생애 사역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만나러 왔던 상황입니다(마12:46-50)
군중들은 예수님께 가족들이 왔다고 알려줍니다.
* 혈통적 모친 마리아와 동생들 - A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 - B
언뜻보면 혈통적 관계를 가진 모친과 동생들을 폄하하는 듯 하게 보이지만,
절대적 가치를 지닌 하나님 나라와 비교해서 우선순위를 철저하게 명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A는 존재의 시작이지만, B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A가 B가 될 때라야만 진정한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A가 창조의 시작이라면 B는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2) 한 여자의 외침에 대한 비교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7-28) |
이 말씀에서도 동일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 예수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되다(혈통적 관점) - A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하나님 나라) - B
A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B의 가치에 도달하는 것이 진정한 가치이며,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이런 패턴이 따라 옵니다.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나님 나라추구),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혈통적 삶)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4. 창조에 대한 간략한 이해
성경은 창조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을 통해 시작된 천지창조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자녀가 찰 때까지 존속되는 목적을 지닌 시작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피조세계가 오염되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먼저 인류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성령을 보내주심은 <재창조>가 됩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재창조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재창조로 인하여 회복된 자들이 주의 재림 때 신령한 몸으로 변할 때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고전15:44)
*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9)
창조의 완성은 우리 몸이 주님의 형상과 같이 변화받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혈통적으로 시작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면서 목적을 성취하는 측면으로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5. 침노하는 자가 얻는 전리품으로서 천국 비유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
<침노하는 자>라는 말에 너무 민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예수님이 전하는 공생애 기간에 하나님 나라의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는 그 가치를 드러냈고 아울러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결단을 촉구하는 다짐을 <침노하는 자>의 힘으로 표현했다고 보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람들은 결단을 해야 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만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가는 삶은 예수님처럼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하는 삶이며, 나누는 삶이며, 이 어둠의 세상을 거스리는
대단히 힘든 삶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전쟁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싸워야 받을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전리품을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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