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볍고, 고속도로로 확장한 것이 큰 후유증으로 나타납니다.
천주교가 연옥을 만들어 현혹시켰다면, 개신교는 구원의 문을 넓게 만들었습니다.
운전중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힘들면 쉬고, 다시 회복되면 가는 것이 우리 신앙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 분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13:30)
본문은 누가복음 13:22-30절로, 구원의 문이 매우 좁고, 구원받을 자가 매우 적다라는 것을
알려주면서(눅13:23-24), 결국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열매 맺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들어감을
강조하는 문맥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라도, 아브라함처럼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마21:43).
반면에 열매 맺는 많은 이방인들, 즉 유대인들이 그렇게 멸시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받고, 순종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그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먼저 된 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들 즉 약속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롬3:1-2,
히4:6).
나중 된 자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받게 된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중 된 자는 잃은 양으로 멸시를 받았지만 결단하고 돌아선 세리와 창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된 자들 가운데서 나중 될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19:30)
복음을 알고 있던 자들 중에서 나중 된 자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주어질까요?
이 문제는 구원론과 연결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구절을 단순히 <신앙의 주기로만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잘할 때가 있으면 못할 때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합한 의미일까요?
죽이고 살리는 심각한 말씀을 모두 죽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음>을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기에 영생을 선물로 받지 못합니다(마19:29-30).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생각한 분들은 이런 구절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작은 바가지로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열매맺는 백성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구원 역시 그렇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들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성령 안에서 거하는 자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이해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몇 줄로도 다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유는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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