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색

숲과 나무

오은환 2019. 6. 23. 03:17

성경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밝히고

그것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려 합니다.

숲과 나무를 통해 더 견고한 모습을 보이고자 합니다.


숲은 그 사람이 지닌 큰 신학적 틀을 의미합니다.

개혁주의냐 알미니안주의냐?

근본주의냐 자유주의냐?

복음주의냐 자유주의냐?

무천년주의냐 전천년주의냐?

역사적 전천년주의냐 세대주의냐?

정통인가 이단인가?


이런 큰 틀(숲)이 형성되면 거기에 속한 나무 역시 정해집니다.

알미니안주의가 개혁주의와 같은 형태를 지닐 수 없듯이 세대주의자 역시 무천년주의나

역사적 전천년주의자와 함께 하기 어렵습니다.

환난 전 휴거를 주장하는 자들이 환난 후 휴거를 주장하는 자들과 동일하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숲과 나무를 일관성 있게 가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무천년주의의 특징이 보입니다. 

숲을 멋지게 형성하고자 구조를 잡는 일에 열심입니다. 

하지만 나무 하나씩 뜯어놓고 보면 형편 없습니다.  

계시록의 멋진 구조로 설득하고자 하지만 각 구절을 그 틀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세대주의 신학 역시 약점이 많습니다.

틀도 각 구절도 억지로 맞추려 하지만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들어가지 않습니다.

결국 종말론뿐만 아니라 복음서까지 왜곡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숲과 나무가 모두 바르게 형성되고 자랄 때 진정한 기쁨이 따라옵니다.

평신도라면 두 가지 모두를 바르게 형성하는데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숲을 꾸미는데 보다는 나무(구절)를 잘 가꾸는 것이 더 지혜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보았던 할머니들의 신앙을 보니 더 그렇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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