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계시록토론

종말론 차이로 신학교가 갈라질 수 있을까?

오은환 2020. 7. 26. 00:58

1900년대 초반 미국교회는 극심한 도전에 직면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서 전통적인 신학을 위협했습니다.

계몽주의 신학자들을 통해 신학계는 큰 영향을 받습니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그 위기의 중심에 섰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등장으로 교단이 갈라졌습니다.

신학교 역시 둘로 나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던 두 신학교 - 프린스톤, 웨스트민스터 - 로

분리되었고, 두 교단 - 북장로교(프린스톤), 정통장로교(웨스트민스터) - 으로 나뉘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기울어진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왔던 메이첸과 매킨타이어 교수는

또 다른 분열 앞에 놓입니다.

술과 담배 문제로 인하여 내홍을 겪습니다.

메이첸 교수는 허용을, 매킨타이어 교수는 금지를 강하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는 종말론에서 발생합니다.

메이첸을 비롯한 다수의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은 무천년주의를,

매킨타이어 교수는 전천년설(구체적으로 세대주의)을 물러서지 않고 주장했습니다.

 

메이첸 교수는 무천년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같이 갈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결국 두 교수는 결별하게 되었고, 매킨타이어 교수는 근본주의로 더 깊이 흘러갑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고 두 교수였다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했을까요?

 

제가 신대원을 다닌 90년대 총신의 종말론은 무천년주의와 역사적 전천년주의가 공존했습니다.

그 당시 한국 어느 신학교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 문제로 인한 논쟁도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학파의 주장이나 큰 결함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관용이 자리잡았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일어난 메이첸과 매킨타이어 교수 사이의 고민이라면

서로 갈라선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그들에겐 신학의 순수성이 어떤 것보다고 더 귀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가 더 성장한 후 갈라지기 보다는 막 시작하는 시점(1937년)에서 갈라진 것도 다행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