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오해로 얼룩진 성령

오은환 2014. 6. 9. 11:34

광대하신 하나님을 잘 이해하는 것이 사실 인간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알면 알수록, 가까이 가면 갈수록 광대하신 하나님이 더 위대하게 나타나고,

우리는 매우 초라함을 보게 되어 모든 것이 은혜이며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자 중에서 다시 타락하여 곁길로 간 자들이 있을까요?

아마도 오랜 시간 신앙생활 자들중에서 크게 타락한 자들은 실상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했기에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매순간 우리와 함께 거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 역동성이 있고 매우 견고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 즉 임마누엘 신앙은 다른말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은 창조 때 아담과 하와로부터 다시 오실 주의 재림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며 증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의 99.999999 % 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내주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까지도 성령이 청중들과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내주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

 

여기서 생수는 예수님이 주실 성령을 가리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이런 생수와 같은 성령이 앞으로 받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성령에 관해 매우 난해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9)

 

이 말씀을 언뜻보면 구약부터 예수님의 공생애(십자가) 기간까지 어느 누구도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더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친절하게도 위 구절이 무슨 뜻인지 자세한 설명을 곁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에 <장차 자신의 이름으로 보낼

보혜사>가 아직 청중들이나 제자들에게 임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아담과 하와를 비롯하여 옛 언약 아래 있었던 모든 구약 백성들에게 <아버지의 성령>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원스럽게 흘러나오는 성령 -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낼 보혜사>이 곧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구약의 아버지의 성령의 임재와 내주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낼 성령의 내주는

왜 많은 차이점을 지닐까요?

왜 한 성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점이 나타날까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령은 자의로 행하지 않고 보내신 분(성부, 성자)의 뜻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성도들에게 조명하고 계십니다.

그림자에게는 그림자로서 역할을 보여주고, 실체에게서는 더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약에서 활동하셨던 <아버지의 성령>은 구약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게 하고,

그 소망을 내주하시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조명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영광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체인 예수님이 오셔서 드러낸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차이점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옛 언약

새 언약

1

<>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고후3:7)

성령으로 <마음 판>에 쓴 것(고후3:3)

2

영광이 있다(고후3:7)

<더욱> 영광스럽다(고후3:8)

3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다(고후3:9)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9)

4

영광되었던 것(고후3:10)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더 이상)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3:10) - 완성됨

5

<없어질 것>도(율법) 영광

길이 있을 것(새 언약)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다(고후3:1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영광이 이렇게 차이가 있듯이, 구약 성도들에게 내주한 <아버지의 성령>과 신약 성도들에게 내주한

<아들의 성령>의 역할도 그 영광을 드러내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옛 언약(구약)

새 언약(신약)

성령의 이름

아버지의 성령/하나님의 성령/

원 보혜사

아들의 성령/예수의 영/

또 다른 보혜사

조명

옛 계명

새 계명

조명의 목적

하나님과 이웃 사랑

하나님과 이웃 사랑

성령의 내주

옛 언약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내주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내주

견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을 견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을 견인

버리심(소멸)

성령을 근심, 반역, 대적한 자들에게

성령이 친히 버리시고 떠나신다

구약과 동일하게 근심, 반역, 대적한 자들 즉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에게서 떠나신다

회개

회개의 기회 부여하고 책망하심

회개의 기회 주시고 책망

보증

구원과 부활의 보증

구원과 부활의 보증

 

 

옛 언약은 문자로서 장차 오실 분의 사랑을 드러냈다면,

새 언약의 예수님은 실체로서 오셨고, 자신의 목숨을 직접 드림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글로서 표현한 것과 실체로서 사랑을 보이신 것은 내용상의 차이점은 없으나,

사랑의 정도를 드러낸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희미함과 뚜렷함의 차이처럼 극명합나다.

 

성령 역시 이 두가지 사실을 조명하심에 있어서 생수를 드러내어 설명하는 것과

직접 보고 마시게 하는 것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우물물을 떠서 마시는 것과(요4장)

우리 배 안에서 흘러 나오는 것처럼 성령의 차이점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물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배에서 나오는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음과 같은 비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