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잘못된 프레임 - 믿음이냐 행위냐

오은환 2014. 6. 5. 00:44

프레임(구조, 뼈대, 틀)을 어떻게 만드냐에 따라 뒤 따라 오는 모든 형태가 결정됩니다.

세모나 네모 혹은 동그라미의 틀을 만들고 그 곳에 쇳물을 부으면 그 모양대로 나오게 됩니다.

프레임은 그 만큼 중요합니다.

또한 한 번 형성되면 바꾸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구원을 논하는데 <믿음 혹은 행위 프레임>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불행하게도 이 두가지 프레임을 유일한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사실상 믿음 혹은 행위는 프레임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관하여 바른 프레임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입니다.

이것이 오리지널 프레임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나 행위는 근본 프레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입니다.

 

1. 믿음의 프레임은 완벽한 것인가?

 

믿음을 강조한 사람들은 입술의 고백을 강조합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그 순간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무엇을 시인합니까?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뒤따라 나오는 구절 역시 인용됩니다.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완벽한 듯한 구절로 더 이상 논란이 없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이 주님 앞에 가는 날 동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평탄할 때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태할 때에도 믿음의 고백이 지속되어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 입니다.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위 구절은 위급한 상황에서의 성도의 믿음의 고백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은 자연인의 힘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깨끗하게 되었고 그 순간 성령의 내주로 거룩하게 되어 나온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자 열매입니다.

그 근원의 프레임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입니다.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 충성과(피스티스 - 믿음) ...(갈5:22-23)

우리말로 충성이라 번역되었지만 원문으로 보면 믿음(피스티스)입니다.

믿음의 근원은 사람의 결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입니다.

즉 옛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새 사람된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의 근원을 이야기 합니다. 

 *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믿음은 성령 안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안에 있을 때 유효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갈5:6)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성령을 빼 버리면 근본 프레임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보증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2. 행위의 프레임은 완벽한 것인가?

 

개신교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분들은 카톨릭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부족해서 행위를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들은 믿음의 외적 표징이 행위로 나타난다는 주장속에서 행위를 강조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복음서를 중심으로 주장을 전개합니다.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행위를 믿음의 표징으로 보면서 압박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의 일치성을 인용합니다(약2:17-24)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예수님의 말씀을 더해서 움직일 수 없는 확신으로 나아갑니다. 

*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마12:33)

 

믿음을 가진 표징의  행위로 구원의 프레임(틀)을 구성하는 것이 완벽한가요?

이런 형태의 프레임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근본은 되지 못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요구한 열매는 무슨 열매입니까?

아직 옛 언약 아래 있고, 장차 새 언약 아래 있을 성도들에게 <무슨 열매를 요구> 합니까?

야고보가 인용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힘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함을 받고 그 결과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열매>이며, <성령이 내주하며 주시는 힘으로서의 행위> 입니다.

이것이 근본 프레임이 되어야 합니다.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성령) 힘을 다하여 수고(행위, 열매)> 하노라(골1:29)

 

아브라함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내주를 보지 못하면 행위는 무의미합니다.

단지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복음서 속에서 성령의 내주를 보지 못하고 행위를 설명한다면 우매함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성령의 내주를 기본으로(약4:5) 말씀하는 행위>를 보지 못하면 자기 의로 귀결되고 맙니다.

구원론에 대한 온전한 프레임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돌아갈 때 수천년 동안 지속된 논쟁은 끝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