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서 위대한 인물 곁에는 힘들게 하는 조연들이 존재합니다.
위대한 사람들과 그 반대되는 인물들을 정리해보면,
* 기독론과 삼위일체에 관하여 아타나시우스 vs 아리우스,
* 자유의지론에 관하여 어거스틴 vs 펠라기우스
* 개혁신학 논쟁에 관하여 칼빈 vs 세루베투스
그런데 진짜 논쟁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화란(네델란드)의 신학자인 카이퍼와 바빙크의 거듭남을 비롯한 모든 신학적 토론들입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바른 신학을 찾아가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보기에 좋습니다.
이들의 논쟁은 후대까지 약 60년 정도 이어집니다.
차영배 교수는 캄펜신학교(바빙크쪽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두 논쟁의 핵심을 짚어줍니다.
언제, 어떻게 중생(거듭남)했는지 상세하게 연구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중생전제설 - 1978년 가을, 겨울호> 논문에 기재된 내용을 요약해봅니다.
차영배 교수는 두 사람의 중생(거듭남) 토론을 잘 설명합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 자유대학의 카이퍼와 캄펜신학교의 신학적 스승인 '더 콕스' 교수까지
이끌어내어 서로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줍니다.
자신의 신학을 뚜렷하게 드러냈던 카이퍼의 <중생의 과정>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생각 속에 그 새사람을 생각하신다.
둘째, 또 하나님께서 그 개인의 성격에 적응이 되도록 '신적 사색'으로 그 새 사람을 조성하사
우리의 새 사람이 되도록 창조하신다.
셋째, 이 새 사람을 간직한 씨앗을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본질 속 중심에 심으신다.
넷째, 이 인간의 본질 중심에 주께서 우리의 자아와 심어진 씨앗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신다.
다섯째, 주 하나님께서 이 생명의 씨앗 속에 적당한 때에 역사하사, 생명이 형성되는 능력으로
우리의 자아가 새 사람으로 나타나도록 하신다.
더우기 카이퍼는 강조하기를 중생은 아무 매개나 수단이 없이 직접 심어진다고 한다.
환언하면 말씀 없이 복음을 들은 일이 없어도 혹은 설교를 듣지 않더라도 이루어진다.
중생은 어떤 경우라도 말씀을 통하지 않고 직접 성령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p.75-76)
카이퍼의 이런 주장은 불신자의 회심 부분을 다루기보다는 신자의 유아가 어떻게 거듭나는지에
관한 접근으로 보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카이퍼의 답변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지만, 그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성경을 벗어납니다.
신자의 유아는 말씀이 없이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로만 거듭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부모가 말씀을 받았기에 그것을 아기에게 은혜로 인정해주십니다.
믿는 부모와 아이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바빙크의 반론은 핵심에서 벗어났습니다.
신자의 유아가 어떻게 중생했는가를 엉뚱하게 로마서에서 찾습니다.
로마서는 불신 이방인들이 어떻게 거듭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요점은 그런 것보다는 언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리에 서느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항상 믿음을 가질 때라고 확언(確言)한다.
전치사 '말미암아'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확실히 보여준다. 믿지도 않는데, 환언(換言)하면
믿기도 전에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먼저 부르심을 받고, 다음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 부르심 다음에 칭의에 이른다"(p.92)
카이퍼의 유아세례의 근거는 중생에서 찾습니다.
유아가 이미 중생(거듭남)했기에 그에 합당하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는데 성경을 따라 증명하지 않고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신학지남, 1978년 가을, 겨울호, p.77-78)
"1. 언약의 자손들이 갓난 아기로 죽는 경우가 많다.
2. 이들이 죄 중에서 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3.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을 우리는 믿는다.
4. 그렇다면 중생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 수 없다.
5. 따라서 이런 유아들이 참으로 중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6. 이제 모든 유아는 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있다.
7. 따라서 신자의 자녀들은 모두 다 생명이 생기는 순간, 환언하면 유아세례 전에,
혹은 이미 모태에 있을 대, 중생의 영원한 은사(혜)를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모든 신자의 유아는 단지 간주할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중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p.77-78)
차영배 교수는 카이퍼를 '신칼빈주의'로 부르기보다는 '초칼빈주의'가 더 어울린다고 평가합니다(p.81).
카이퍼의 신학이 칼빈주의를 떠난 신칼빈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칼빈이 생각하지 않는 부분까지
확대해석하기에 붙여진 초칼빈주의로 봅니다.
유아세례에 대해서 역시 카이퍼에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유아가 중생했기에 세례가 유효하다는 결론은 분명 바르고, 칼빈 역시 그런 관점에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습니다. 칼빈이 유아세례를 무척 강조한 것이 구약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곧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며, 할례가 불결한 죄를 제거하는 실질적인 사건으로 보았기에
카이퍼의 견해가 바빙크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카이퍼의 유아세례 관점이 할례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구약에서 유아세례의 근거를 가져왔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이 점은 바빙크도 해당됩니다.
바빙크는 유아세례를 행할 때에 유아에게 아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칼빈과는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신자의 유아가 언제, 어떻게 중생했는가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카이퍼나 바빙크는 올바른 관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왜 유아세례가 중요한지와 근원이 되는 할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접근하였기에 토론이 겉돌고 있으며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한 칼빈의 견해와 방법은 무엇일까요?
칼빈은 유아세례의 중요성을 너무도 절실하게 느꼈고, 복음의 본질로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할례로 보았기에 할례의 중요성과 효력에 대해서도 잘 파악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았더라도 명확하게 의사표현을 안한 부분이 있어서 후대 신학자들에게
혼란을 느끼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카이퍼와 바빙크 진영의 토론은 성경에 근거한 과정이 미약하여,
서로에게 필요한 답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칼빈의 견해를 파악하지 못함입니다.
이런 것들이 맞물려서 지혜롭지 못한 분열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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