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의 거듭남에 대해서 이렇게 선명하게 쓴 글이 있을까요?
아브라함 카이퍼는 막힘없이 그의 생각을 비수처럼 꽂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나라 네델란드에서 공부했던 차영배 교수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학지남, 1978년 가을, 겨울호, p.77-78)
1. 언약의 자손들이 갓난 아기로 죽는 경우가 많다.
2. 이들이 죄 중에서 난 것을 성경이 증거한다.
3.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을 우리는 믿는다.
4. 그렇다면 중생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 수 없다.
5. 따라서 이런 유아들이 참으로 중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6. 이제 모든 유아는 다 일찍 죽을 가능성이 있다.
7. 따라서 신자의 자녀들은 모두 다 생명이 생기는 순간, 환언하면 유아세례 전에,
혹은 이미 모태에 있을 대, 중생의 영원한 은사(혜)를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모든 신자의 유아는 단지 간주할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중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칼빈 역시 유아세례를 단지 관습적인 것이기에 꼭 지켜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아세례에 모든 힘을 집중한 것은 거기에서 '복음의 원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칼빈은 카이퍼처럼 뚜렷하게 유아세례와 중생(거듭남)을 연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는 바빙크의 견해를 취하여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단지 언약이며 명령이기에 따라야 할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또한 부모가 아이를 언약으로 잘 키우겠다는 정도의 약속으로 만족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빙크의 견해는 칼빈이나 카이퍼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빙크의 견해는 중생이 없는 유아세례이므로 오히려 재세례파적 성향으로 흘러갑니다.
성령론이 약했던 바빙크로 인해 진리의 희미함이 오늘날의 교회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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