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예수님이 보혜사였나?

오은환 2022. 4. 30. 08:42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 했을 때 보혜사(돕는자, 위로자, 상담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 성도들 안에 들어가서 그들의 심령을 변화시키고 새 힘을 주셨을까요?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대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토스(보혜사)는 죄를 변론하고 용서해주는 자로 생각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땅이 아닌 승천하신 예수님의 지위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성도들의 죄를 변론해주며 사하여 주는 일을 합니다.

성육신 하신 때가 아닙니다.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왜 이 문제가 중요할까요?

만일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의 보혜사가 되었고, 오순절 이후에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준다면,

매우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요14:16).

이스라엘 곧 모든 구약 성도들 안에서 내주하고, 역사하며, 조명하고, 인도하셨던 보혜사 곧 <아버지의 성령>을

전혀 알지 못하며, 구약을 복음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오셨던 성육신 때는 예수님의 행적이 여러가지로 제약을 받았습니다.

한 장소에 머물며, 만나는 사람들 역시 가까이 있는 자들로 한정됩니다.

또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 안으로 들어가서 역사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남아 있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떠나야만 보혜사되신 성령께서 와서 모든 자들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승천하신 예수님이 보혜사를 보내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 일을 하늘로 가셨던 자신이 다시 오심으로 말씀합니다.

성육신하신 몸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신 예수님이 보혜사이신 성령을 보내어 함께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육체로 계실 때의 제한적인 만남이 아니라 보혜사를 보냄으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합니다.

 

*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요14:28)

 

예수님은 보혜사 곧 성령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 가운데 현재 내주하여 있고, 오순절에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또한 영원토록 내주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가 생소한 존재가 아니라고 알려줍니다.

이미 그들 안에 계신 분이며, 또 다시 계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 그는(또 다른 보혜사) 진리의 영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제자들이 보혜사를 알고 있는 시점은 현재입니다.

알다(기노스케테, know)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입니다.

결코 미래시제가 아닙니다.

 

그 보혜사는 현재에도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거하다(메네이, remains) 역시 현제시제를 사용합니다.

 

오순절 이후에는 오실 보혜사에 대해서는 미래시제를 사용합니다.

'카이 엔 휘민 에스타이'로 and in you will be 로서 미래에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는 성령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현재 제자들과 청중들 그리고 이스라엘 성도들 가운데 있는 성령은 아버지가 보낸 아버지의 성령(마10:20)이며,

구속사역을 완수한 후 보낼 성령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낼 아들의 성령입니다.

절대로 성령이 두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누구의 이름으로 보내는가에 차이일 뿐이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을 때는 육체를 지닌 몸으로 인하여 장소와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한 예로 나사로의 죽음 역시 그렇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고백처럼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요11:21,32).

성육신 때 예수께서 제자들 속에, 청중들 속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거하며 보혜사 역할을 했다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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