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장로교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신학의 지침을
제공하는 매우 유익한 책입니다.
칼빈의 신학이 기독교 강요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확고한 기독교 강요를 바탕으로 그의 주석들은 자세한 해석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만 보고 주석을 보지 않으면 프레임과 적용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때로는 완벽하게 소화해내지 못한 부분도 존재하리라 생각됩니다.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칼빈의 신학과 주석이 어떤 관계에 있으며, 제대로
전달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 포도원 품꾼 비유에 대한 칼빈의 견해(마20:1-16) -
칼빈은 어떤 프레임 아래서 포도원 품꾼 비유를 해석할까요?
칼빈은 먼저 너무 깊게 나간 해석들을 경계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자들은 이 비유를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을 유대인들로, 나머지 시간에 제 각각
온 자들을 이방인으로 해석하려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석을 제한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따라 열심히 지켜야 함을 말한 반면에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키라는
구절이 없음도 이상한 해석이라 평가합니다.
칼빈의 구약과 율법에 대한 이해가 곧바로 등장합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기로 하고 그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기는 했으나
이 약속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기 행위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칼빈주석 02. 공관복음 2. p. 201)
칼빈의 구약에 대한 주장은 중요한 부분에서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 준수가 어떤 보상을 주는가에서 칼빈은 구원을 얻는
도구로 해석합니다. 그 결과 구약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마치 이방인들처럼 아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했습니까?
아니면 소수의 남은 자들은 율법을 준수하였기에 구원에 이른 것입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어떤 방법으로 율법을 준수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그들이 왜 율법을 받았는지에 대한 근원을 살피는
의문이 칼빈에게서 일어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구약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이 내주하여 거룩하게 되어 거듭났기에 -
율법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런 프레임이 설정되지 않으면 큰 혼란에 빠져 버립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견해는 일부 훌륭한 부분을 지녔습니다.
"주님께서 활용하신 의인법은 그들의 공로나 과실을 초월하여 무가치한 자들에게 상급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존귀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인간은 누구라도 원망할 수 없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같은 책, p. 202).
하지만 이 비유에 대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부분에는 매우 민감하며
조심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악의와 증오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 말씀에 의하여
책망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들은 이 비유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대등한 보상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p. 202)
도대체 이런 주장은 무슨 의미일까요?
구약 유대인들이 이방 신자들보다 더 큰 상급을 받는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반대일까요?
칼빈은 마지막 구절(16절)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그리스도께서 의미하신 내용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누구나 더욱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겸손하여 자신을 타인들보다 우선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이며, 타인들도 자신과 공통된 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님은 격려하고
계신다."(같은 책, p.203)
칼빈의 견해를 읽으며 그가 너무도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비유의 속뜻을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일부 청중들의 마음을 드러내고,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시려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
포도원 품꾼과 유사한 탕자의 비유(눅15장)에서 탕자만 생각하여 해석한다면
못난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큰 아들(유대의 지도자들)의 잘못을 책망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시에 와서 일한 자들과 탕자의 형의 생각이 왜 잘못되었는지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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