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관한 전통 개신교 관점"은 루터교 신학자인 'A. 앤드류 다스'가 쓴 글로
개신교 전통신학의 장점과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이전의 가톨릭의 혼란했던 관점을 벗어났다고 자평했지만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다스는 무엇이 바울과 유대교의 생각인지를 개신교적 관점에서 3 가지로 기술합니다.
"(1) 제2성전기 유대인들은 행위에 따른 의와 율법주의의 종교를 고수했다.
(2) 바울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강조했다.
(3) 행위 없는 순전한 은혜에 대한 강조가 구원하고 의롭다 선언하는 하나님의 특징이다."
(p. 165)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면서 그의 순종을 거의 다루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전통적인 해석가들은 바울의 관점에 따르면 율법이 엄격하고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사도는 율법에 순종하려는 헛된 시도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그 대척점에 놓는다."(p. 178)
다스가 생각하는 개신교의 율법과 회개에 대한 전통적 관점은 의아함을 자아냅니다.
"바울에 의하면 죄를 범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다는 수단이 참으로 문제가
된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동물 희생제사가 하나님의 자비나 죄 용서를 얻는 효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p. 181)
다스의 견해를 따르면 마치 구약은 어떤 죄 사함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해됩니다.
율법은 단지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석합니다.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갈2:21, 3:21), 율법은 자체적으로
범법 행위에 대한 해결 가능한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 셈이다...바울은 율법의 계명들을
제2성전기 유대교의 은혜롭고 자비로운 맥락에서 분리시켰다."(p. 183)
다스를 통해 본 바울에 관한 전통적 관점은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율법이 이미 거듭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과 거듭나기 전의 이방인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적절한 분별이 없이 마구잡이로 해석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율법은 거듭난 후에 주어졌습니다.
이미 의롭게 되고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주어졌기에
이런 상태에서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며 지킬 수 있는지를 다루어야 합니다.
신약의 이방인들은 구약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상태에서 율법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기에
이제 예수 안에서 펼쳐진 의에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당연히 예수 안에서 율법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유대인)은 거듭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로 율법을 성령의 조명 아래서
볼 수 있고, 또 율법을 행할 능력을 받음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신30:6).
신약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율법 앞에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두려워해야 하는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스뿐만 아니라 이 책의 토론자들에게서도 이런 관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없는 상태로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불신자가 동시에 율법 앞에 서 있는데 모두 동일한 상태라고 묘사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다스는 '행위'에 대해서 철저하게 침묵합니다.
"율법을 행하면 살 것이다(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을 애써 외면합니다.
①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②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
이니라(레18:5)
③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 성도들인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불신자였던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함
입니다.
구약성도들이 성령의 조명과 힘주심을 통해 율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킬 수 있었던 것을 전혀
모르면서 불신자였던 이방인들과 동급으로 놓고 율법 문제를 다루니 엉뚱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에게 율법은 갈라디어서나 로마서에 언급된 내용과는 전혀 다릅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불신자였을 때 이방인들을 율법 앞에 세운 것을 기록했기에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부분이 강조됩니다. 왜냐하면 불신 이방인들은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며
정죄받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진노의 대상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구약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참으로 귀한 책입니다.
그래서 율법 찬가(시편119편)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구약 유대인들에게 달콤한 꿀과 같고(시19:10, 119:103) 인생길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시119:105).
다스는 이런 행위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부족하여 엉뚱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레18:5절의 "율법을 행하면 살리라"를 유대인들에게만 주고 이방인들은 무관하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레18:5절을 질문하던 율법사를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셨습니다
(눅10:25-28).
"경쟁자들의 또 다른 증거 본문인 레위기 18:5(갈3:12)절은 사람이 생명(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갈라디아인들이 필요에 따라 율법을 준수하게끔
인도(유도)하는 권면이다. 그러나 원래 토라 구절은 유대인들을 가리키고 있다."(p. 240)
다스의 이런 견해(루터교)는 극단적인 율법폐지론으로 이어집니다.
"엄격하고 심지어 완전한 순종에 대한 율법 자체의 요구는 바울의 생각에서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좌초됐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공허한 일과 인간의 공로가 된다."(p.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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