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즉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없이는 성숙함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세계적인 학자들보다 더 뛰어나다"
이런 말 듣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연구의 목적지는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남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정확하지 않고 조금 뛰어난 해석은 또 다른 숙제를 남겨두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다 - 루터"
지푸라기는 새끼를 꼰 후 남은 하찮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아궁이에 들어가도 잠깐이면 불에 타 버립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교회에서 성경퀴즈대회를 많이 했습니다.
지역에 있는 대회에 나가야 해서 '복음서'를 많이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허전함이 몰려왔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 것일까?"
복음서에는 그런 질문도 답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은 그저 스토리를 잘 아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을 좀 더 넓혀보니 복음서만 가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구약 전체와 신약의 야고보서까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 구약과 복음서 그리고 야고보서에는 '의롭게 되는 길'을 제시하지 않았을까요?
왜 바울서신들은 '의롭게 되는 길'을 매우 강조했을까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주석한 책들을 보면 너무 답답함을 느낍니다.
로이드 존스는 수많은 책들을 썼지만 구약에서 거듭남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문제를 다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설교만 하면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바울은 칭의만 이야기하고 성화를 소홀히 했을까요?
구약과 복음서 그리고 야고보서는 성화만 이야기하고 칭의를 소홀히 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모두 칭의와 성화를 한 몸처럼 생각하고 전했습니다.
루터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평가했습니다.
모르고 하는 말은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냅니다.
구약과 복음서 그리고 야고보서는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미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의롭게 됨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태중에서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아> 의롭게 되었기에 반드시 외적인 할례를 행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미 의롭게 되었기에 칭의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이방인 성도들에게 자신이 의롭게 된 것이 여러 가지 길들 가운데 하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몰랐기에 '칭의'를 강조한 것입니다.
서신서는 야고보서와 히브리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 썼습니다.
다신교 사회에서 수천 년간 살아온 이방인들에게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을 이야기해야 하기에
칭의를 깊이 다룬 것입니다.
오늘날 할례에 대한 이해 부족은 구약의 깊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창15-17장)이 칭의를 이루는 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스데반은 이 깊은 진리를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인들은 할례의 언약(행7:8)을 받았는데 왜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르지
않는가를 책망합니다(행7:51).
스데반의 설교는 칭의(할례의 언약)와 성화(성령의 조명을 따라 삶)를 아주 잘 표현했고,
그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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