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난해구절

부자가 천국가기 어려운 이유

오은환 2014. 12. 30. 07:46

성경을 읽다보면 부자된다는 것에 대해 주저함이 생길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단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모두 율법에 근거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난해한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근거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논하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구절들을 외면하려 합니다. 

 

1. 부자와 나사로

 

이 비유는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비유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통해 진리를 전달합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문자적으로 완전하게 율법을 지켰다하더라도 실상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2. 삭개오

 

삭개오 역시 문자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비록 세리장으로서 큰 부를 축적했지만 그가 율법에 소홀히 한 것은 없게 보입니다. 

그의 삶이 율법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런 그가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깨닫고 난 후 율법을 바라보고 행동한 것을 본 후에야 비로소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합니다(눅19:9). 

 

율법을 준수했지만 준수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3. 부자 관원 청년

 

이 청년은 율법에 관하여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준수했습니다(눅19:21). 

문자적으로 그는 율법에 관해 전혀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서 부족함을 발견했습니다. 

그 부족함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왜 율법을 준수했는데도 준수하지 않은 것으로 정죄할까요?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입니까?

 

4. 바울의 율법 준수

 

바울 역시 율법에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빌3:6). 

그런 그가 그리스도를 안 후 율법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습니다. 

그가 준수했던 문자적 율법 준수가 왜 그렇게 가치가 없다고 본 것일까요?

 

문자적 율법 준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부분들을 세밀하게 글로서 지키거나 금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이란 그 자체를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조명하는 깊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전제로 그 가치가 평가됩니다. 

 

5. 예수님이 요구하는 율법 준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율법 준수는 문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조명하는 거룩한 삶으로서 율법 준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구절이 단순히 간음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준수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조차 용납하지 않아야 율법을 준수했다는 것을 인정해줍니다(마5:27-28). 

 

이런 삶은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죄를 이길 수 있는 행동 역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상상할수도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역시 동일합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을 넘어 그를 위해 기도함으로 율법이 준수됨을 보여줍니다(마5:43-44). 

 

삭개오가 성령의 조명 아래서 율법을 이해하자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불타 올랐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절반이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눕니다. 

율법에는 없는 조항이지만 성령의 조명 아래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6. 율법에서 가장 큰 것 두 가지

 

율법학자나 예수님은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을 주저함 없이 두 가지로 압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강도가 인간이 결코 할 수 없는 수준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사랑하라 합니다. 

누가 이런 수준의 사랑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부어주신 사랑만이 율법을 조명하며 지킬 수 있게 하는 근원입니다(롬5:5, 신30:6). 

부자들과 받은 것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혼자서만 간직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삶은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향해 줄 것이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조명 아래서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풍성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나사로를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부자는 결국 성령의 조명을 거부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면에서 그가 받은 계시의 부요함을 이웃을 향해 나누는데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수고를 넘어 성령이 조명하는 부분까지 힘을 다해서 수고했습니다(골1:29).

이것이 성령의 조명을 받는 자의 삶이며, 곧 율법을 준수하는 참된 의미가 됩니다.